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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에도 시대 일본 주자학의 가장 충실한 전도사가 죽기 직전 남긴 원고는, 그 주자학을 의심하는 책이었어요.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1630-1714)은 일본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예요.
주자학이란 12세기 중국의 주자(朱熹)가 완성한 사상으로, 인간의 도덕과 우주의 원리를 하나의 체계로 묶으려 한 철학이에요.
에키켄은 이 사상을 60년 넘게 일본 전역에 강의하고 책으로 펴낸 사람이에요.
그런데 84세에 그는 『대의록(大疑録)』을 썼어요.
'큰 의심의 기록'이라는 제목 그대로, 평생 가르쳐온 주자학의 핵심 이론을 정면으로 의심하는 책이에요.
이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비유하면 이래요.
평생 한 회사에 충성한 임원이 은퇴 직전에 "내가 팔던 제품은 사실 결함이 있었다"는 책을 써 두고 죽은 것과 같아요.
그것도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요.
에키켄은 이 원고를 죽은 뒤에야 공개되도록 남겨뒀어요.
자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온 것을 부정하는 책을 살아서 내놓을 수는 없었던 거예요.
하지만 그 의심을 마음속에만 묻고 죽을 수도 없었어요.
그가 의심한 것은 주자학의 핵심 개념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에요.
주자는 세상 모든 것을 '이(理, 원리·법칙)'와 '기(氣, 물질·에너지)'라는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했어요.
오늘날로 치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처럼, 이 두 가지가 본래 분리돼 있다는 게 주자의 주장이었어요.
에키켄은 말년에 이것이 틀렸다고 생각했어요.
"이와 기는 원래 하나다. 애초에 나뉜 적이 없다."
60년 동안 가르쳐온 틀을 스스로 부수는 결론이었어요.

가이바라 에키켄은 자기 인생을 임상실험 삼은 뒤에야 장수에 관한 책을 썼어요.
1713년, 84세의 에키켄은 『양생훈(養生訓)』을 펴냈어요.
양생훈이란 몸과 마음을 오래 건강하게 유지하는 법을 정리한 실용서예요.
그리고 이듬해, 에키켄은 85세로 세상을 떠났어요.
이게 단순한 아이러니가 아닌 이유는 숫자 하나 때문이에요.
당시 일본의 평균 수명은 40세 안팎이었어요.
에키켄은 그 두 배를 살고 나서야 비로소 장수의 비결을 정리한 거예요.
『양생훈』의 내용은 놀랍도록 구체적이에요.
음식은 배가 부르기 전에 멈춰라.
화를 내면 몸이 먼저 망가진다, 감정의 기복을 줄여라.
이론이 아니에요.
그가 80년 넘게 직접 지켜온 습관들이에요.
결국 이 책은 자기 몸을 데이터로 삼아 검증한 보고서에 가까워요.
사람들이 "비결이 뭡니까"라고 물으면 대개는 두루뭉술하게 답해요.
하지만 에키켄은 달랐어요.
"내가 이렇게 살아봤더니 이렇게 됐어요"라며 평생의 기록을 책으로 건넨 거예요.

에키켄은 여성의 도리를 가르친 책의 저자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의 아내는 함께 시를 쓰고 산을 오르는 동행자였어요.
에키켄이 38세 되던 해, 16세의 도켄(東軒)과 결혼했어요.
22살 차이였어요.
도켄은 한시를 짓고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었어요.
에키켄은 이 아내와 함께 교토와 에도를 여행했어요.
같은 책을 읽고, 같은 풍경 앞에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후대에 에키켄의 이름으로 알려진 『여대학(女大学)』은 여성에게 순종을 가르치는 교본이에요.
일본 에도 시대 여성 교육의 교과서로 쓰였죠.
그런데 이 책의 내용과, 에키켄이 실제로 살아간 방식은 묘하게 어긋나요.
'여자는 이래야 한다'고 강의하는 교수의 책상이, 정작 아내와 공들여 주고받은 메모로 가득 차 있는 것과 같아요.
사실 학자들은 『여대학』이 에키켄의 원본을 후대에 누군가 가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에키켄이 도켄과 살아간 방식을 보면, 그 책의 내용은 그와 어울리지 않거든요.
도켄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에키켄은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고 전해져요.
순종하는 아내가 아니라, 글을 함께 쓰던 사람을 잃은 충격이었을 거예요.

가이바라 에키켄은 책상 위 유학자가 아니라, 환갑에 산으로 들어간 채집가였어요.
1709년, 80세의 에키켄은 『대화본초(大和本草)』를 펴냈어요.
일본 각지의 동식물과 광물을 직접 관찰해 기록한 16권짜리 박물지예요.
기재된 종만 1,500종이 넘어요.
그런데 이건 책에서 베낀 게 아니에요.
60대부터 규슈 일대를 직접 걸어다니며 채집한 내용들이에요.
그 결과를 80세에 책으로 완성한 거예요.
에키켄에게 이 둘은 모순이 아니었어요.
주자학에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개념이 있어요.
사물을 직접 탐구해서 앎에 이른다는 뜻인데, 스마트폰 사용법을 매뉴얼로 읽는 것보다 직접 눌러봐야 이해되는 것처럼, 세상을 알려면 몸으로 부딪쳐야 한다는 거예요.
그는 이 원칙을 글자 그대로 살았어요.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식물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분화하고 있었는데, 에키켄은 혼자서 맨발로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어요.
『대의록』에서 스승을 의심하고, 『양생훈』에서 몸의 법칙을 정리하고, 산을 오르며 식물을 채집한 에키켄.
그는 언제나 책에서 시작해서 현실로 돌아왔어요.
84세에 평생의 이론을 의심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가 평생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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