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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문명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처음 체계적으로 적은 학자는, 17세에 자기 가족이 무너지는 걸 먼저 봤어요.
이븐 할둔은 1332년 튀니스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가문은 원래 스페인 세비야의 명문 귀족이었는데, 1248년 기독교 왕국이 세비야를 함락하자 북아프리카로 이주한 망명 귀족이었어요.
수백 년이 지나도 안달루시아 혈통을 자랑하던 집안이었습니다.
17살 되던 해인 1348년, 흑사병이 튀니스를 덮쳤어요.
흑사병은 14세기 유럽과 지중해 전역을 휩쓴 페스트 대유행으로, 당시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간 재앙이었어요.
이 전염병은 이븐 할둔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그의 스승들까지 한꺼번에 데려갔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수능 준비 중인 17살이 팬데믹으로 가족과 선생님 전부를 잃은 셈이에요.
그런데 바로 이 아이가 훗날 문명의 흥망성쇠를 처음으로 이론화하는 학자가 됩니다.
자기가 무너지는 세계를 먼저 눈으로 보고 나서야, 비로소 "왜 세계는 무너지는가"를 쓸 수 있었던 거예요.

21개월간 감옥에 갇혔던 학자가 풀려난 지 7년 만에, 이번엔 옆 나라 재상실에 앉아 있었어요.
1354년, 이븐 할둔은 모로코 페스의 마린 왕조 궁정에 들어가 술탄 아부 이난을 섬겨요.
마린 왕조는 당시 북아프리카를 지배하던 강력한 이슬람 왕조였어요.
그런데 3년 후, 정적들의 음모에 휘말려 감옥에 갇힙니다.
21개월이었어요.
풀려난 건 술탄이 죽으면서예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가둔 사람이 먼저 죽어야 그도 나올 수 있었던 거죠.
풀려난 이븐 할둔은 스페인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로 건너가 외교 사절이 됩니다.
기독교 왕국 카스티야의 페드로 국왕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기도 했어요.
그다음에는 베자이아(지금의 알제리)로 이동해 하집, 즉 재상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집은 오늘날로 치면 국무총리와 대통령 비서실장을 합쳐놓은 자리예요.
경쟁 관계인 라이벌 회사들을 2-3년마다 옮겨 다니며 매번 임원으로 영입되는데, 한 번은 감옥까지 갔다 온 시니어가 딱 이 모습이에요.
이 시절 이븐 할둔은 탁월한 학자이기 이전에, 어디서나 살아남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오늘날 사회과학 교과서가 인용하는 이론의 초고는, 알제리 사막 한복판의 외딴 요새에서 5개월 만에 쓰였어요.
1375년, 이븐 할둔은 궁정 생활에 진이 빠져 모든 걸 내려놓았어요.
알제리 사막의 외딴 요새 칼라트 이븐 살라마로 들어갑니다.
현지 부족장 가문이 그에게 제공한 산성이었어요.
그곳에서 약 5개월 만에 『무캇디마(Muqaddimah)』의 초고를 완성해요.
무캇디마는 '서설'이라는 뜻으로, 그가 쓴 세계사의 서문이에요.
하지만 실제로는 서문이 본문보다 훨씬 유명해진 책이 됩니다.
이 책의 핵심 개념은 아사비야(asabiyya)예요.
쉽게 말하면 "우리 편이라는 끈끈한 연대감"이에요.
모르는 사람보다 우리 동네 사람을 더 믿고 돕는 그 감각이요.
이 아사비야가 강한 집단은 왕조를 세우고, 편해지면 아사비야가 느슨해져요.
4세대쯤 지나면 새 집단에게 무너진다는 게 그의 이론이에요.
그는 도시와 유목민의 충돌, 노동 분업, 가격이 형성되는 원리까지 이 책에서 함께 다뤘어요.
오늘날로 치면 사회학, 경제학, 역사철학을 혼자서 다 쓴 거예요.
그것도 5개월 만에, 사막 한복판에서요.
번아웃에 빠진 임원이 외딴 산장에 틀어박혔다가 우연히 새로운 학문 분야를 세 개 만들어버린 셈이에요.

1401년 겨울, 69세의 학자는 밧줄을 타고 다마스쿠스 성벽을 내려갔어요.
그 무렵 이븐 할둔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말리키파 대법관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말리키파는 이슬람 법학의 4대 학파 중 하나로, 그 학파에서 가장 높은 법관직이에요.
그런데 1401년 1월, 티무르가 다마스쿠스를 포위합니다.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나 인도, 페르시아, 아나톨리아를 차례로 짓밟은 당대 최강의 정복자였어요.
항복 협상이 결렬되자, 이 69세 노학자는 성벽에서 밧줄에 몸을 묶고 내려갔어요.
적의 진영 한가운데로요.
두 사람은 약 35일을 만났어요.
티무르는 그에게 북아프리카의 지리와 역사를 물었고, 이븐 할둔은 요청에 따라 보고서를 써서 바쳤어요.
세계를 정복하려는 사람이, 세계의 역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정보를 청한 거예요.
오늘날로 치면 침략 직전의 독재자가 세계적 경제학자를 불러 차를 마시며 분석 자료를 건네받는 장면이에요.
그래도 다마스쿠스는 약탈당했어요.
이븐 할둔의 보고서는 도시 하나를 구하지 못했어요.
훗날 이 만남을 기록한 그의 자서전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나는 오랫동안 이 인물을 만나고 싶었다. 그를 만났을 때, 내가 들은 것보다 훨씬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사람은 자신의 스승이나 왕이 아니라, 도시를 불태운 정복자였습니다.
이 만남 뒤 이븐 할둔은 카이로로 돌아가 5년을 더 살다가 1406년 세상을 떠나요.
17세의 고아, 감옥, 사막의 성, 그리고 티무르의 진영.
문명의 흥망을 이론으로 쓰려면, 그걸 직접 살아내야 했던 걸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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