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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나가르주나는 600년을 살았다고 전해요.
한 사람이라면 말이에요.
인도 전통 기록은 그가 기원전 2세기 무렵에 태어나 기원후 3세기까지 살았다고 말해요.
수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숫자예요.
그런데 인도 전통은 이 숫자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서구 학자들은 다른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 결론이 뭐냐면, 나가르주나라는 이름 아래 실제로는 여러 명의 다른 사람이 합쳐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예요.
그의 이름은 대승불교 철학의 출발점이 된 핵심 논서 중론(中論)에도 붙어 있어요.
의학 처방집에도, 연금술 지침서에도, 왕에게 바친 정치 조언서에도 붙어 있어요.
중론이 모든 사물의 본성을 논리로 해체하는 순수 철학서라면, 연금술 지침서는 금속을 변환하는 실용서예요.
같은 저자라고 보기엔 세계가 너무 달라요.
셰익스피어의 진짜 정체가 누구냐를 두고 수백 년째 논쟁이 이어지는 것처럼, 나가르주나도 똑같은 상황이에요.
한 이름 아래 여러 사람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도 우리는 그를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부르며 마치 한 명인 것처럼 이야기해왔어요.

용수라는 이름은 그가 바다 밑 용궁에서 책을 들고 나왔다는 전설에서 왔어요.
그의 원래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나가르주나예요.
'나가(nāga)'는 뱀이나 용처럼 생긴 신화 속 존재를 뜻하고, '아르주나(arjuna)'는 위대한 영웅을 뜻해요.
두 단어를 합치면 "용의 영웅" 정도가 돼요.
전승에 따르면 그는 용왕이 수백 년간 깊은 바닷속에 숨겨두었던 경전을 직접 찾아가 가져왔어요.
그 경전이 바로 반야경(般若經)이에요.
반야경은 공사상의 뿌리가 된 대승 경전들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에요.
중국으로 전해진 불교는 그를 그대로 용수(龍樹)라고 번역했고, 한국에서는 지금도 그 이름이 쓰여요.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어요.
그 시기에 인도에서는 출처를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는 새로운 대승경전들이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기존 불교 전통 어디에도 이 경전들의 기원이 없었어요.
용궁 전설은 바로 그 경전들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높아요.
출처를 밝힐 수 없는 책에 "오래된 사원 지하에서 발견됐다"는 발문을 붙이는 것과 비슷한 일이에요.
발견 이야기가 그럴듯할수록 책의 권위도 따라서 높아지니까요.

나가르주나가 가장 자주 한 말은 「공」이 아니라, 「그 공은 네가 생각하는 그 없음이 아니다」였어요.
공(空, śūnyatā)은 불교에서 가장 오해받는 개념이에요.
이 글자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거의 반드시 같은 오해를 해요.
"아, 아무것도 없다는 거군요."
나가르주나가 평생 싸운 상대가 바로 그 오해예요.
그가 말한 공은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에 가까워요.
어떤 사물도 그 자체만으로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다른 무언가에 기대어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래요.
나는 부모가 있어야 태어나고, 공기가 있어야 살고, 사회가 있어야 언어를 쓸 수 있어요.
어느 하나라도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모습이 아니에요.
나가르주나는 그 상태, 그러니까 모든 것이 다른 것에 기대어 있는 그 상태를 공이라고 불렀어요.
그는 중론에서 직접 이렇게 경고했어요.
"공을 잘못 이해하면 독사를 잘못 잡은 것과 같다."
독사를 꼬리부터 잡으면 되려 물리는 것처럼, 공을 허무주의로 받아들이면 오히려 위험하다는 거예요.
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어요.
"공도 공하다."
산스크리트 원문으로는 공공(śūnyatā-śūnyatā)이라고 해요.
공이라는 개념 자체도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는 선언이에요.
제자들이 "없음"을 또 하나의 절대 진리로 믿어버리자, 그 믿음마저 부숴야 했던 거예요.
가르침을 전했더니 가르침을 우상처럼 섬기는 제자를 보고, 그 가르침도 해체해야 했던 선생의 이야기예요.

나가르주나는 모든 철학을 부순 뒤, 자기 자리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았어요.
그는 회쟁론(廻諍論)이라는 짧은 논서에서 이렇게 썼어요.
"나는 어떤 명제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오류가 없다."
회쟁론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반박에 응답하기 위해 쓴 글이에요.
그 응답의 핵심이 결국 이거였어요.
"나한테는 반박할 주장 자체가 없어요."
그가 쓴 도구는 사구부정(四句否定, catuṣkoṭi)이에요.
어떤 주장이든 네 가지 형태로 쪼갠 뒤 그 넷을 모두 부정하는 논리 방법이에요.
있다, 없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이 네 가지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모든 주장의 형태예요.
나가르주나는 상대가 어떤 입장을 취하든 이 틀 안으로 끌어들여 하나씩 해체했어요.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어느 자리에도 서지 않았어요.
누가 "불성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 그는 "존재란 무엇인지 먼저 정의해라, 그 정의가 성립하는가?"라고 물으며 해체해요.
그러면 상대가 "그렇다면 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돌아서면, 그 주장도 같은 방법으로 해체해요.
어느 쪽으로 가도 바닥이 없는 거예요.
공격하려면 표적이 있어야 해요.
나가르주나는 그 표적을 아예 없앴어요.
그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려는 사람들은 결국 빈 공중에 주먹을 날리는 셈이었어요.
철학의 역사에서 자기 주장을 세워 이긴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주장 자체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서 이긴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 비어있는 자리가 정말 비어있는 건지, 아니면 우리 눈에만 안 보이는 건지는, 나가르주나 본인도 말하지 않았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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