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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스승을 시험하러 간 청년이 그날 제자가 되어 돌아왔다.
1881년, 18세의 나렌드라나트 다타가 캘커타(오늘날 콜카타) 외곽의 허름한 사원을 찾아갔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합리주의 청년이었고, 목적은 하나였다.
그곳의 수행자 라마크리슈나가 신을 보았다고 주장한다는 소문을 직접 가서 깨부수는 것이었다.
나렌드라나트는 사원에 들어서자마자 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신을 보았습니까?"
강연자를 깎아내리려 손든 학생이 한 문장으로 말문이 막혀버린 것과 같았다.
라마크리슈나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지금 내가 너를 보는 것보다 더 또렷이 본다."
나렌드라나트는 논파할 말이 없었다.
그날 이후 그는 라마크리슈나의 제자가 되었다.
반박하러 간 사람이 그날 저녁 제자로 돌아온 것이다.

수도자가 된 비베카난다가 5년의 방랑 끝에 내린 결론은 영성이 아니라 빵이었다.
1886년, 라마크리슈나가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렌드라나트는 출가해 비베카난다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리고 혼자서 길을 나섰다.
카슈미르에서 시작해 인도 최남단 칸야쿠마리까지, 5년 동안 무일푼으로 걸었다.
그가 길에서 만난 것은 명상하는 수행자가 아니라 굶주린 농민이었다.
카스트 제도 탓에 가장 낮은 계층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밥도 못 먹고, 글도 못 읽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카스트 제도는 힌두교 전통의 신분 구조예요.
태어난 가문이 평생의 직업과 사회적 위치를 결정했고, 자기 의지로는 벗어날 수 없었어요.
그는 일기에 적었다.
"인도에 필요한 건 종교가 아니라 빵과 교육이야."
신비를 좇던 수도자가 5년 만에 경제와 위생을 설교하기 시작한 것이다.

1893년 9월 11일, 시카고 컬럼버스 홀의 7천 명이 첫 인사 한 문장에 동시에 일어섰다.
그 자리까지 가는 과정은 더 드라마틱했다.
비베카난다는 인도 마드라스의 지지자들이 모아준 돈으로 미국에 건너갔지만, 시카고 도착 후 신임장을 잃어버려 입장을 거부당했다.
돈도 다 떨어진 그는 화물열차 빈 칸에서 잠을 잤다.
세계종교회의는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열린 행사였다.
기독교·이슬람·불교·힌두교 등 세계 각 종교의 대표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역사 최초의 종교 간 대화 무대였다.
하버드 대학교 교수 J.H. 라이트가 우연히 그를 만났다.
라이트는 비베카난다에게 자격증을 요구하는 건 태양에게 빛날 자격이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고 했다.
교수가 직접 추천서를 써주었고, 비베카난다는 겨우 단상에 올랐다.
9월 11일, 연단 앞에 선 그는 입을 열었다.
"미국의 자매와 형제 여러분(Sisters and Brothers of America)."
당시 종교 연설은 "신사 숙녀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게 관례였는데, 그는 청중을 가족이라 불렀다.
7천 명이 2분간 기립박수를 보냈다.
입장권도 없던 무명의 수도자가 미국 언론의 스타가 되는 순간이었다.

세계가 그의 다음 강연을 기다리던 1902년 여름, 비베카난다는 자신이 예언한 대로 39세에 눈을 감았다.
시카고 이후 그는 미국과 영국에서 강연을 이어갔다.
베단타 철학을 서양에 소개하는 일이었다.
베단타는 "모든 존재는 하나이며 신성은 각자의 안에 있다"고 보는 힌두교의 핵심 사상으로, 서양에서는 당시 처음 접하는 개념이었다.
1897년 인도로 돌아와 라마크리슈나 미션을 세웠다.
빈민 구호와 교육을 결합한 수도회였다.
방랑 시절 직접 본 굶주림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제자들에게 이상한 말을 남겼다.
"나는 마흔을 넘기지 않을 거야."
1902년 7월 4일, 비베카난다는 명상 자세로 앉아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전성기 한복판에서 자기 손으로 무대를 닫은 것과 같은 마지막이었다.
입장권도 없던 수도자가 세계 무대에 올랐다가, 예언한 나이에 조용히 내려온 것이다.
그의 삶에서 계획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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