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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근대 철학의 아버지는 책상이 아니라 침대에서 일했어요.
오전 11시 전에는 일어나지 않았고, 그게 게으름이 아니라 그의 공식 업무 방식이었어요.
데카르트는 어릴 때 프랑스 라 플레슈의 예수회 학교에 다녔어요.
예수회는 가톨릭 수도회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체계적인 교육을 운영한 집단이에요.
몸이 워낙 약했던 탓에 학교 측에서 특별 허가를 내줬어요.
침대에서 더 오래 쉬어도 된다는 예외 조치였고, 그 특권은 어른이 된 후에도 유지됐어요.
가장 위대한 아이디어도 1619년 겨울, 독일 울름의 따뜻한 방에서 이불을 덮고 누운 채로 나왔어요.
"모든 걸 의심하면 끝에 뭐가 남지?" 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어요.
그 질문이 훗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가 됐어요.
재택근무자가 침대에서 노트북을 펴고 가장 좋은 기획안을 떠올리는 것처럼, 데카르트에게 침대는 사무실이었어요.
서양 철학의 가장 위대한 혁명이 이불 속에서 시작됐다는 게, 이미 충분히 이상해요.

갈릴레오가 유죄 판결을 받던 날, 데카르트는 거의 다 쓴 자기 원고를 서랍 깊숙이 밀어넣었어요.
1633년,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어요.
지동설, 즉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주장을 했다는 이유였어요.
그 소식이 네덜란드에 있던 데카르트에게 전해졌어요.
그는 당시 『세계론(Le Monde)』 이라는 책을 거의 완성해 두고 있었어요.
갈릴레오처럼 지동설을 지지하는 자연철학 서적이었어요.
갈릴레오가 유죄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데카르트는 출판을 전면 철회했어요.
친구이자 동료 철학자인 마랭 메르센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어요.
"나, 너무 신중해서 이 원고를 통째로 태워버리고 싶어."
진리를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 철학자가, 정작 자기 진리를 세상에 내놓는 건 두려워한 거예요.
같은 말을 했다가 동료가 잘리는 걸 목격한 직원이 자기 폴더를 조용히 닫아두는 것처럼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고 말한 그 사람이, 다섯 살 딸의 시신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에서 하녀 헬레나 얀스와의 사이에서 딸을 얻었어요.
딸의 이름은 프랑인(Francine) 이었고, 결혼 밖에서 태어난 아이였어요.
데카르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지만, 이 아이만은 진심으로 아꼈어요.
1640년, 프랑인은 다섯 살에 성홍열로 세상을 떠났어요.
성홍열은 고열과 발진을 동반하는 감염병으로, 당시엔 어린아이에게 치명적이었어요.
데카르트는 며칠 동안 흐느꼈어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 직접 이렇게 썼어요.
"이건 내 인생 최대의 슬픔이야."
이성이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고 가르친 사람이, 가장 비이성적으로 무너진 순간이었어요.
그리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여왕은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어요.
단지 새벽 5시에 만나고 싶었을 뿐이에요.
1649년,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이 데카르트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어요.
유럽 최고의 지식인 중 한 명이던 그를 스톡홀름 궁정으로 초청해 개인 철학 교사로 삼겠다는 내용이었어요.
데카르트는 초청을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여왕은 몹시 바빴고, 일정상 유일하게 비어 있는 시간은 새벽 5시 였어요.
한겨울 스웨덴,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왕실 도서관에서 그 시간에 강의를 해야 했어요.
평생 오전 11시까지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에게, 그건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일정이었어요.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데카르트는 폐렴에 걸렸어요.
1650년 2월 11일, 54세의 나이로 스톡홀름에서 숨을 거뒀어요.
종교재판도, 정치적 박해도 그를 죽이지 못했어요.
야행성인 사람이 회장님 일정에 맞춰 매일 새벽 출근하다 결국 쓰러지는 것처럼, 데카르트는 후원자의 이른 아침 미팅에 무너졌어요.
침대에서 철학을 시작한 사람의 마지막치고는, 너무 황당한 결말 아닌가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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