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유럽 수학의 흐름을 바꾼 사람은 교수가 아니라, 아버지를 따라 항구 도시를 전전하던 상인 아들이었어요.
레오나르도 피사노, 훗날 '피보나치'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될 이 사람은 1170년경 이탈리아 피사에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그의 유년은 유럽이 아닌 북아프리카에서 흘렀어요.
아버지는 피사 상인 조합의 세관 관리로 북아프리카 부지(오늘날 알제리)에 파견된 주재원이었어요.
피보나치는 그 아버지를 따라 항구 도시로 건너가 상인 견습생으로 무역 실무를 익혔어요.
요즘으로 치면 해외 주재원 아버지를 따라간 중학생이, 학교 대신 시장 바닥에서 세상을 배운 거예요.
그 시장에서 피보나치는 아랍 상인들의 계산법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익혔어요.
"이쪽 방법이 훨씬 빠르고 정확하잖아."
그 생각 하나가 결국 유럽 수학 전체를 흔드는 책으로 이어졌어요.

우리가 당연하게 쓰는 숫자 0과 1, 2, 3은 800년 전 유럽에서 한때 금지된 기호였어요.
1202년, 피보나치는 산반서(Liber Abaci)를 출간했어요.
'계산판의 책'이라는 뜻인데, 인도와 아라비아에서 쓰던 0~9 숫자와 자릿수 체계를 유럽에 처음으로 본격 소개한 책이에요.
당시 유럽은 로마 숫자, 즉 I, V, X, L로 모든 계산을 처리했어요.
문제는 그 로마 숫자로 곱셈과 나눗셈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거예요.
XLVII 곱하기 XXIII을 손으로 계산해보면, 머릿속이 바로 하얘져요.
그런데 아랍 숫자로는 47 × 23을 몇 초 만에 풀 수 있어요.
하지만 유럽 사람들은 이 편리한 숫자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특히 숫자 0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 어떻게 기호를 붙이냐"며 의심받았고, 피렌체를 비롯한 일부 도시에서는 아예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어요.
모두가 주판을 쓰는 회사에 혼자 엑셀을 들고 출근했더니 "그 파란 화면은 믿을 수 없다"며 쫓겨나는 상황과 비슷해요.
그래도 산반서는 상인들 사이에서 천천히 퍼져나갔어요.
결국 수백 년에 걸쳐 로마 숫자는 유럽에서 사라지고, 아랍 숫자가 그 자리를 완전히 차지했어요.

피보나치 수열은 원래 토끼 문제 풀이였고, 피보나치는 자기 이름이 거기 붙을 줄 전혀 몰랐어요.
산반서 한 챕터에는 이런 연습문제가 실려 있어요.
"한 쌍의 토끼가 매달 새끼 한 쌍을 낳고, 태어난 토끼는 두 달째부터 번식하기 시작한다면, 1년 뒤에는 몇 쌍이 될까요?"
답을 따라가면 1, 1, 2, 3, 5, 8, 13, 21, 34, 55, 89, 144가 나와요.
규칙은 간단해요.
앞의 두 수를 더하면 다음 수가 되는 구조예요.
이게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피보나치 수열이에요.
그런데 반전이 있어요.
피보나치 본인은 이 문제를 딱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산반서에 실린 수십 개 연습문제 중 하나였을 뿐, 특별히 강조하지도 않았어요.
'피보나치 수열'이라는 이름을 붙인 건 무려 19세기 프랑스 수학자 에두아르 뤼카예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써둔 메모 한 줄이, 700년 뒤 내 이름이 붙은 법칙으로 교과서에 실리는 거예요.
피보나치가 알았다면 황당해했을지도 몰라요.

피사의 상인이 토끼로 풀던 문제가, 오늘 아침 당신이 본 해바라기 씨앗 배열 속에 그대로 들어 있어요.
19세기 이후 식물학자들이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어요.
해바라기 씨앗이 만드는 나선, 솔방울의 비늘 배열, 앵무조개 껍데기의 곡선에서 34, 55, 89처럼 피보나치 수가 계속 등장한 거예요.
자연이 이 숫자를 선택한 이유는 효율이에요.
피보나치 수열에서 인접한 두 수의 비율, 예를 들어 55 나누기 34는 약 1.618에 수렴해요.
이걸 황금비라고 부르는데, 씨앗을 이 비율로 배열하면 같은 면적에 가장 많은 씨앗을 빈틈 없이 채울 수 있어요.
자연이 오랜 진화 끝에 스스로 찾아낸 최적해예요.
자연은 피보나치를 전혀 몰랐어요.
하지만 수억 년의 진화가 고른 답과, 12세기 상인이 토끼 문제로 끄집어낸 수열이 정확히 일치했어요.
회사에서 장난 삼아 만든 공식이 알고 보니 자연 전체가 수억 년째 쓰고 있던 공식이었다는 황당함과 같아요.
아버지 따라 항구 도시를 떠돌던 소년이 시장 바닥에서 주워들은 계산법, 그 계산법으로 낸 토끼 문제 하나가 8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해바라기 씨앗 속에 살아 있어요.
그 사실을 알고 나서 해바라기를 보면, 조금 다르게 보이지 않나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