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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306년 런던의 한 상인은 그해 집세를 은화가 아니라 후추 10파운드로 받았어요.
이상한 일이 아니었어요.
당시 유럽에서 후추는 금과 같은 무게로 거래됐고, 집세·세금·지참금까지 후추로 지불한 기록이 곳곳에 남아 있거든요.
영어에는 지금도 'peppercorn rent'라는 관용구가 있어요.
직역하면 '후추알 한 알짜리 임대료'인데, 오늘날엔 '사실상 공짜에 가까운 명목 임대료'를 뜻하는 말이에요.
처음 이 말이 생겼을 땐, 후추 한 알이 진짜로 상당한 가치를 가졌기 때문에 만들어진 표현이에요.
오늘날 명품 가방을 들고 파티에 나타나는 셀럽처럼, 13세기 귀족은 후추 한 자루를 꺼내 보이는 것으로 부를 자랑했어요.
마트 진열대에서 3천 원이면 사는 그 작은 후추통이, 당시엔 귀족 금고 속에 보관되는 사치품이었어요.
그렇다면 왜 유럽인들은 이렇게 향신료에 목을 맸을까요.
냉장고도, 방부제도 없던 시대를 생각해 보세요.
고기는 금방 썩고, 음식은 하루가 다르게 퀴퀴해졌는데 향신료는 냄새를 덮고 맛을 살리는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었어요.
그리고 향신료는 유럽에서 한 톨도 자라지 않았어요.
오직 동쪽, 아시아에서만 왔어요.
그래서 유럽인들은 기어코 그 길을 뚫으러 나서기 시작했어요.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한 게 아니에요.
향신료를 찾다가 길을 완전히 잘못 든 것이에요.
1492년, 이탈리아 출신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실의 투자를 받아 인도 향신료 산지로 가는 서쪽 항로를 개척하러 출항했어요.
당시 향신료 교역을 장악하던 오스만 제국이 동쪽 육로를 막아버렸거든요.
유럽은 새로운 길이 절실했어요.
그런데 콜럼버스가 닿은 곳은 카리브해였어요.
그러고는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는데, 자신이 진짜 인도에 도착했다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강남행 내비게이션을 켰는데 정반대 방향인 인천에 도착한 뒤 "여기가 강남이군" 하고 우긴 셈이에요.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아시아에 닿았다고 믿었어요.
결국 인류사를 뒤흔든 신대륙 도달은, 향신료를 찾다 벌어진 거대한 길치 사건이었어요.
하지만 그 실수가 세계 지도를 완전히 바꿔버렸어요.
더 무서운 건 그다음이에요.
유럽인들이 항로를 개척하면서,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서서히 지배당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지배가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폭발한 곳은, 향신료를 둘러싼 작은 섬들이었어요.

역사상 최초의 기업 주도 대학살의 동기는 금도 석유도 아니었어요.
육두구였어요.
육두구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나 뱅쇼에 살짝 갈아 넣는 향신료예요.
지금은 흔한 재료지만, 17세기 초까지 지구상 딱 한 곳에서만 자랐어요.
인도네시아 동쪽 끝, 손바닥만 한 군도인 반다제도가 그 유일한 산지였어요.
162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총독 얀 피터스존 쿤이 그 섬에 상륙했어요.
VOC는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면서, 자체 군대까지 보유한 사실상의 무장 기업이었어요.
쿤의 목표는 단 하나였어요.
"육두구 공급을 독점하겠다."
그래서 반다제도 원주민 약 1만 5천 명 중 대부분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아버렸어요.
한 민족이 사실상 사라졌어요.
이유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뿌리는 가루 한 꼬집 때문이었어요.
한 기업이 희귀 원료를 독점하려고 도시 하나를 통째로 불도저로 밀어버린 것과 같아요.
당시 유럽인들은 이걸 '문명화'라고 불렀어요.
그러니까 식민 지배의 맨얼굴은 총칼이 아니라, 장부와 독점 계약서였던 거예요.

1667년, 네덜란드는 맨해튼을 가질 수 있었어요.
그런데 더 비싼 것을 택했어요.
육두구 섬 하나.
브레다 조약은 네덜란드와 영국이 식민지를 맞바꾼 협상이에요.
브레다는 지금의 네덜란드 남부에 있는 도시로, 이 조약에서 두 나라는 각자 점령하고 있던 땅을 교환하기로 했어요.
네덜란드가 내놓은 것은 북미의 뉴암스테르담, 지금의 맨해튼이었어요.
영국이 내놓은 것은 반다제도의 작은 섬 룬 섬이었어요.
네덜란드는 룬 섬을 골랐어요.
그들 입장에선 완전히 합리적인 결정이었어요.
당시 육두구 1파운드 가격이 맨해튼 땅값보다 비쌌거든요.
오늘로 치면, 누군가 "제주도 감귤밭 줄 테니 강남 아파트는 네가 가져" 했을 때, '내가 남는 장사'라고 확신하며 감귤밭을 선택한 거예요.
하지만 향신료 독점 시대는 끝났어요.
다른 나라들이 육두구 묘목을 몰래 빼돌려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희소성이 사라졌어요.
반면 맨해튼은 오늘날 세계 금융의 심장이 됐어요.
룬 섬은 지금 구글 지도에서 찾아보기도 어려운 이름이에요.
향신료 한 줌이 항로를 열고, 민족을 지우고, 오늘날 세계 지도의 국경선을 그었어요.
우리가 마트에서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드는 그 작은 후추통 하나 안에, 수백 년의 탐욕과 폭력과 어마어마한 오판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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