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906년 4월 19일, 라듐을 맨손으로 다루던 물리학자는 파리의 한 골목에서 마차 바퀴에 머리가 깔려 숨졌어요.
그날 파리엔 비가 내리고 있었고, 피에르 퀴리는 센 강 근처 도팽 거리의 젖은 자갈길을 우산을 쓰고 걷고 있었어요.
미끄러진 순간, 말이 끄는 짐마차 뒷바퀴가 그의 두개골을 깔고 지나갔어요.
오늘날로 치면 핵연료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사람이 횡단보도에서 택배 오토바이에 치인 셈이에요.
수년간 방사선에 피폭되어도 살아남은 그를 끝낸 건 젖은 자갈길이었어요.
라듐도, 암도, 방사선 후유증도 아닌 말발굽이었다는 사실이 어딘가 허무하고, 그래서 오히려 더 오래 머릿속에 남아요.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는 라듐 추출법을 특허로 등록하면 평생 부자가 될 수 있었어요.
그들은 그러지 않았어요.
1902년, 두 사람이 라듐 0.1그램을 처음 순수하게 분리해 내자마자 미국 기업들이 달려왔어요.
라듐은 당시 그램당 금값의 3천 배였는데, 추출법 특허 하나만으로도 세기의 거부가 될 수 있었어요.
피에르와 마리는 "과학은 모두의 것"이라며 거절했어요.
비트코인 초창기에 채굴 코드를 혼자 갖고 있던 사람이 "이건 내 돈이 아니다"라며 공개해 버린 것과 같아요.
두 사람은 그 뒤로도 비가 새는 목조 창고 실험실에서 라듐을 끓였고, 1903년 노벨상 상금을 받기 전까지 경제적으로 빠듯하게 살았어요.
거부가 될 수 있었던 두 사람이 스스로 고른 자리는 비 새는 헛간이었어요.

인류가 방사능을 발견하기 1년 전, 마리는 피에르의 청혼을 거절하고 파리를 떠났어요.
1894년 여름,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서 피에르를 만난 폴란드 유학생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는 그해 청혼을 받았지만 고향 바르샤바로 돌아갔어요.
이유는 단순했어요. 조국을 떠나기 싫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피에르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1년 동안 편지를 보냈고, 그중 한 통에는 이런 문장이 담겨 있었어요.
"If I only could follow you, I would go with you to Poland." (당신을 따라갈 수만 있다면, 폴란드까지도 함께 가겠어요.)
결국 마리는 1895년 7월 그와 결혼했어요.
신혼여행은 자전거 두 대로 프랑스 시골을 일주하는 것이었는데, 그 여행이 어딘가 이 두 사람을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것 같아요.
20세기 과학사를 바꾼 실험 파트너십은 한 번 차인 고백에서 시작됐어요.

피에르 퀴리는 자기 팔뚝에 라듐을 10시간 동안 묶어두고, 살갗이 검게 변해 가는 과정을 노트에 받아 적었어요.
1901년, 피에르는 유리관에 담은 라듐 염을 자신의 왼팔 안쪽 피부에 직접 붙였어요.
며칠 뒤 붉은 반점이 생겼고, 수 주 뒤에는 살이 검게 괴사했어요.
52일 만에 간신히 아물었는데, 그는 이 모든 과정을 의학 저널에 논문으로 투고했어요.
오늘날로 치면 의사가 자기 팔에 방사선을 직접 쬔 뒤 며칠마다 사진을 찍어 논문으로 낸 셈이에요.
이 기록이 훗날 방사선 치료(radiotherapy), 즉 방사선으로 암세포를 파괴하는 현대 의학의 출발점이 됐어요.
피에르는 자기 몸을 실험체로 쓴 덕분에 "라듐이 암세포를 파괴할 수 있다"는 단서를 직접 손에 넣었어요.
그런데 그때 이미 피에르의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고, 다리가 저리는 증상도 시작됐어요.
방사선 피폭 후유증이 몸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어요.
라듐이 자신을 천천히 죽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은 사람이, 결국 1906년 파리의 한 골목에서 마차에 치여 사라졌어요.
그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방사선 치료가 어디까지 갔을지, 지금도 가끔 그 생각이 들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