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582년 10월 5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어요.
13일도, 14일도 마찬가지였어요.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그해 'Inter gravissimas'라는 칙서를 발표했어요.
칙서란 교황이 교회 전체에 내리는 공식 명령서예요.
그 내용은 딱 한 줄이었어요: "10월 4일 목요일의 다음 날은 10월 15일 금요일이다."
오늘날로 치면 이런 상황이에요.
어느 날 아침 스마트폰을 켰더니 "OS 업데이트 완료. 오늘은 10월 15일입니다"라는 알림이 떠 있는 거예요.
어젯밤까지 10월 4일이었는데, 열흘이 통째로 사라진 거예요.
그 열흘 사이에 생일이 낀 사람, 계약 기한이 있던 사람, 임금 지급일을 기다리던 노동자들은 기준을 잃었어요.
시간이 '자연'이 아니라 '명령'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실감했을 거예요.

카이사르의 달력은 매년 11분씩 봄을 훔치고 있었어요.
율리우스력은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도입한 달력이에요.
1년을 365.25일로 계산했는데, 실제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보다 11분 14초가 더 길었어요.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1500년이 쌓이면 얘기가 달라져요.
1582년 무렵이 되자 춘분이 실제 시점보다 열흘 앞당겨진 채 달력에 찍혀 있었어요.
춘분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봄의 시작점으로, 가톨릭에서 부활절 날짜를 계산하는 기준이에요.
달력이 틀리니 교회는 예수의 부활을 실제 시기와 어긋난 날에 기념하고 있었어요.
교황청은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어요.
그래서 불러들인 사람이 예수회 수도사 클라비우스예요.
당시 유럽 최고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클라비우스는 수십 년에 걸친 계산 끝에 이렇게 결론 냈어요: "400년 중 윤년을 97번으로 줄이면 오차가 거의 사라진다."
종교 의식을 지키기 위한 개혁이 결국 정밀 과학에 기댄 셈이었어요.

영국인들은 170년 동안 일부러 11일씩 뒤처진 채 살았어요.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폴란드 같은 가톨릭 국가들은 1582년 즉시 그레고리력을 받아들였어요.
하지만 개신교 국가들은 달랐어요.
개신교는 16세기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온 기독교로, 두 진영의 갈등은 지금의 어떤 이념 대립보다 훨씬 첨예했어요.
이유는 단 하나였어요.
"교황이 만든 달력이잖아."
더 정확하다는 걸 알면서도 원수 진영이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거부한 거예요.
영국은 무려 1752년에야 그레고리력을 채택했어요.
9월 2일 다음 날을 9월 14일로 건너뛰었는데, 그때 런던 거리에서는 "우리의 11일을 돌려달라!"는 시위가 벌어졌다는 기록이 있어요.
정확성보다 정체성이 먼저였던 거예요.
정교회를 따르는 러시아는 더 늦었어요.
정교회는 가톨릭과 개신교와는 또 다른 세 번째 갈래의 기독교예요.
러시아는 1918년까지 율리우스력을 고수했는데, 그 결과 역사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날짜 문제가 생겼어요.

무신론 혁명가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교황의 달력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어요.
1917년 10월 혁명은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세력이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사건이에요.
볼셰비키는 "노동자와 농민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공산주의를 내세운 혁명 세력이에요.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 25일 일어났지만, 그레고리력으로는 11월 7일이었어요.
1918년 레닌은 포고령으로 그레고리력을 공식 채택하면서 2월 1일 다음을 2월 14일로 건너뛰었어요.
그런데 이때부터 우스운 상황이 생겼어요.
혁명 기념일인 '10월 혁명'을 해마다 11월 7일에 기념해야 했거든요.
소련은 "신은 없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를 외친 철저한 반종교 국가였어요.
그런데 전 세계가 공통으로 쓰는 달력은 교황이 만들었어요.
레닌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는데도 받아들인 건, 이념보다 실용이 이긴 순간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매일 확인하는 스마트폰 날짜도, 회사 달력도, 모두 1582년 교황이 서명한 칙서에서 시작됐어요.
그 칙서 한 장이 누군가의 열흘을 지워버렸고, 사라진 날을 돌려달라고 시위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사실 누군가의 결정이었을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