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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진화론의 창시자는 원래 시골 교회 목사가 될 예정이었어요.
이게 농담처럼 들리지만, 진짜예요.
1825년, 열여섯 살 찰스 다윈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에든버러 의과대학에 입학했어요.
아버지 로버트 다윈은 당대 잘 나가는 의사였고, 아들도 당연히 그 길을 걸을 거라 믿었죠.
그런데 첫 수술 참관에서 모든 게 어그러졌어요.
당시에는 마취제가 없었어요.
환자를 수술대에 묶고 아무 통증 완화도 없이 메스를 대는 게 당연한 시대였어요.
다윈은 어린아이가 울부짖는 수술을 지켜보다가 수술실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어요.
그 뒤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어요.
의대를 포기하자 아버지는 두 번째 카드를 꺼냈죠.
"의사가 싫다면 목사나 해라."
그렇게 다윈은 케임브리지 크라이스트 칼리지로 향했어요.
영국 국교회 목사는 당시 꽤 안정된 직업이었어요. 시골 교구에서 설교하며 조용히 사는 삶이었죠.
아버지는 이번엔 통하겠지 싶었을 거예요.
그런데 다윈은 케임브리지에서 엉뚱한 것에 빠져들었어요.
딱정벌레 수집이었어요.
훗날 자서전에 이렇게 썼어요. "처음 딱정벌레를 맨손으로 잡았을 때의 흥분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어."
수술실에서 도망친 소년은 목사가 되지 못했고, 결국 세상을 바꾼 이론을 쓰게 됐어요.
창조론을 무너뜨릴 사람이 처음엔 그 창조론이 설교되는 교회의 목사 후보였다는 게 참 묘하죠.
갈라파고스에 있는 동안, 다윈은 진화론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어요.
그냥 새를 모았을 뿐이에요.
1831년, 스물두 살 다윈은 영국 해군 탐사선 HMS 비글호에 박물학자로 승선했어요.
비글호는 5년간 남반구 해안선을 측량하는 배였어요. 다윈은 항해 내내 동식물 표본을 수집하는 게 임무였죠.
1835년 갈라파고스 제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섬마다 부리 모양이 다른 새들을 발견했어요.
등껍질 패턴이 섬마다 조금씩 다른 거대 거북도 수집했어요.
그는 그것들을 꼼꼼히 포장해서 영국으로 가져왔어요.
반전은 귀국 후에 일어났어요.
런던 동물학회에서 표본을 분류하던 조류학자 존 굴드가 다윈에게 말했어요.
"이 새들이요, 같은 종이 아니에요. 섬마다 전부 다른 종이거든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다윈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딸깍 맞물렸어요.
현장에서는 '이 섬 새, 저 섬 새'로 보였던 것들이 집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 거예요.
여행 중 무심코 찍은 사진을 귀국 후 다시 보다가 "아, 이게 그런 뜻이었구나" 싶은 순간, 바로 그거예요.
1858년 6월 18일, 우편함을 연 순간 다윈은 공포에 질렸어요.
"이 사람이 내 이론을 그대로 써버렸어."
다윈은 1838년에 이미 자연선택 이론의 핵심을 노트에 정리해 두었어요.
자연선택이란, 환경에 잘 맞는 개체가 더 많이 살아남아 번식하고 그 특성이 후손에게 퍼진다는 개념이에요.
그런데 20년 동안 발표하지 않았어요.
반발이 두려웠어요.
당시 영국에서 "인간이 원숭이와 같은 조상에서 왔다"는 주장은 신성모독에 가까웠어요.
다윈은 증거를 더 모으고 또 모으며, 조심조심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던 사이, 말레이 제도의 섬들을 떠돌며 표본을 팔아 생계를 잇던 독학 박물학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편지를 보내온 거예요.
14쪽짜리 논문 초고였는데, 다윈이 20년간 혼자 품고 있던 이론과 거의 똑같았어요.
"제 생각이 맞는지 의견을 주시겠어요?"라는 한 줄과 함께요.
다윈의 친구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과 식물학자 조지프 후커가 중재에 나섰어요.
두 사람의 논문을 묶어 런던의 생물학 학술 단체 린네 학회에서 공동 발표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이듬해 1859년, 『종의 기원』이 세상에 나왔어요.
다윈이 출판을 결정한 건 준비가 끝나서가 아니었어요.
20년간 아껴둔 아이디어를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먼저 발표하려 한다는 공포 때문이었어요.
선두를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이 20년의 침묵을 깼어요.
다윈을 신앙에서 떼어낸 건 이론이 아니라, 열 살 딸의 기침 소리였어요.
이 사람은 논리보다 슬픔에 먼저 무너졌어요.
1851년, 다윈의 큰딸 앤이 열 살의 나이로 결핵성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다윈은 앤을 무척 사랑했어요. 아이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그는 조용히 교회를 등졌어요.
아내 엠마 웨지우드는 독실한 영국 국교회 신자였어요.
유명한 웨지우드 도자기 가문 출신의 사촌이자, 평생 신앙을 지킨 사람이었죠.
두 사람의 믿음은 앤의 죽음 이후 완전히 갈라졌어요.
다윈은 앤이 죽은 뒤 교회 예배에 나가지 않았어요.
"선한 아이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라는 질문을 신에게 던질 수 없었어요.
이론으로 이미 신의 창조를 의심하던 사람이, 딸의 죽음으로 마음의 문도 완전히 닫아버린 거예요.
그런 다윈이 1882년에 세상을 떠나자, 영국 의회에서 청원이 올라왔어요.
결국 다윈은 웨스트민스터 사원, 수백 년간 왕실의 장례와 성가대의 찬송이 울려 퍼지던 영국 기독교의 심장에 안치됐어요.
아이작 뉴턴의 묘 바로 옆이었어요.
신의 창조를 자연법칙으로 대체한 사람이 그곳에 누운 거예요.
신앙을 잃은 계기는 딸의 기침 소리였는데, 그를 마지막으로 배웅한 건 교회의 찬송가였어요.
다윈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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