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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중국 철학사에서 가장 많이 읽힌 노자 주석의 저자는 스물셋에 병으로 죽은 청년이었어요.
왕필은 226년 위(魏)나라에서 태어났어요.
위나라는 중국이 세 나라로 쪼개졌던 삼국 시대, 그 중 가장 강력했던 나라예요.
그는 평생 단 한 번, 상서랑(尚書郎)이라는 관직에 올랐어요.
상서랑은 오늘날로 치면 정부 부처의 기안 담당 주무관 정도예요.
높은 자리가 아니에요.
그런데 그 짧은 생 동안 남긴 두 권의 책, 『노자주』와 『주역주』는 이후 1700년간 동아시아의 표준 해석으로 쓰였어요.
대학을 막 졸업한 나이의 청년이 쓴 논문이 이후 천 년의 교과서가 된 셈이에요.
249년 가을, 역병이 돌았고 왕필은 그해 숨을 거뒀어요.
스물셋이었어요.

하안은 왕필을 만나고 나서 자기 해석을 다시 쓰기 시작했어요.
하안(何晏)은 위나라 조정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던 최고 권세가였어요.
동시에 그는 현학(玄學)의 대표 인물이기도 했어요.
현학은 유교가 지배하던 시대에 노장(老莊) 사상을 재해석해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가던 당시의 최신 학풍이에요.
하안은 십대 후반의 왕필을 만났어요.
관직도, 배경도 없는 청년이었어요.
하지만 하안은 그를 만나고 나서 이렇게 말했어요.
"공자께서 '후생가외(後生可畏, 젊은이는 두렵다)'라 하셨는데, 이 사람과는 하늘과 사람의 경계를 논할 만하다."
오십 대 고위 대신이 십대 청년 앞에서 사실상 "내 수준을 넘는다"고 인정한 거예요.
그것도 공개적으로.
수십 년 경력의 학과장이 갓 입학한 신입생 앞에서 "나보다 낫다"고 말하는 상황이에요.

왕필의 한 문장은 그때까지 도가 세계의 서열을 완전히 뒤집었어요.
어느 날 배휘(裴徽)라는 고위 관리가 왕필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어요.
배휘는 당시 사람을 평가하고 인재를 추천하는 이부상서 직책을 맡고 있었어요.
오늘날로 치면 인사 담당 차관 정도예요.
질문은 이것이었어요.
"무(無)가 만물의 근본이라면, 왜 공자는 이를 말하지 않았고 노자는 끊임없이 말했는가?"
무(無)는 그냥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에요.
노장 사상에서 무는 세상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오는 근원,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가장 깊은 원리예요.
이 원리를 두 거장이 왜 다르게 다뤘냐는 게 배휘의 질문이었어요.
왕필의 답변은 이랬어요.
"공자는 무를 이미 체득했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고, 노자는 아직 유(有)의 영역에 머물렀기 때문에 자신이 이르지 못한 것을 말했습니다."
이 답이 왜 파격이냐면, 왕필은 도가의 창시자 노자를 오히려 공자보다 낮은 위치에 놓은 거예요.
최고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말이 없고, 말이 많은 사람은 아직 거기 못 간 사람이라는 논리예요.
음악으로 치면, 진짜 대가는 기법을 설명하지 않고 그냥 연주해요.
그런데 이걸 말한 사람이 바로 노자 주석을 쓴 왕필이에요.
"내가 해석하는 노자는, 공자보다 한 수 아래였어요"라고 스스로 선언한 셈이에요.
이 역설이 오히려 그의 해석을 더 강력하게 만들었어요.

왕필의 주석이 완성되던 해, 그의 후견인 하안은 사마의의 칼 아래 일족이 몰살당했어요.
249년 1월, 고평릉(高平陵) 사변이 일어났어요.
군사 실권자 사마의(司馬懿)가 권력을 장악한 쿠데타였어요.
황제가 선조의 묘를 참배하러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수도를 장악한 거예요.
하안은 그 쿠데타의 반대편에 있었어요.
체포됐고, 삼족이 멸해졌어요.
삼족 멸문이란 본인뿐 아니라 부모, 형제, 자식까지 처형당하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에요.
그리고 같은 해 가을, 왕필도 역병으로 숨을 거뒀어요.
쿠데타가 아니라 전염병이었어요.
스물셋이었어요.
스승은 정치 보복으로, 제자는 팬데믹으로 같은 해 함께 사라진 거예요.
위나라 현학의 황금기는 반년 만에 끝났어요.
하지만 왕필이 남긴 주석은 살아남았어요.
17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노자를 읽을 때 가장 많이 의지하는 해석은 스물셋에 죽은 그 청년의 것이에요.
왕필이 더 살았다면 무엇을 더 썼을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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