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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합격증을 받은 그는 임용 대신 서점 주소를 챙겼다.
1825년, 최한기는 사마시에 합격했다.
사마시란 오늘날로 치면 공무원 시험 1차 합격쯤 된다.
이걸 통과하면 양반의 체면이 서고, 본시험인 대과만 보면 관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멈췄다.
벼슬길로 가는 문을 스스로 두드리지 않겠다고 했다.
서울 남촌, 지금의 중구 일대에 서재를 차리고 평생 재야 학자로 남겠다는 결심이었다.
당시 양반에게 이건 단순한 진로 변경이 아니었다.
가문의 위신을 함께 내던지는 일이었다.
더 이상한 건 억울한 사정이 없다는 점이다.
정약용처럼 유배를 당해 어쩔 수 없이 재야로 밀려난 것도 아니었다.
최한기는 선택할 수 있었는데, 자리 대신 서재를 골랐다.
서울대 의대에 합격하고도 개원 대신 평생 독학과 서재 생활을 택한 사람, 딱 그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손해인 선택을 그는 아무렇지 않게 했다.

남촌의 그의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책이 사는 곳이 되어갔다.
최한기는 조선 사람이 직접 베이징에 갈 수 없었지만, 방법이 있었다.
청나라에 파견되는 외교사절인 연행사와 통역관 역할을 하는 역관을 통해 베이징 서점의 신간을 주문할 수 있었다.
문제는 값이었다.
청나라에서 들여오는 책 한 권 가격이 어떤 경우에는 집 한 채 값에 맞먹었다.
그런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물려받은 재산을 거의 전부 장서에 쏟아넣었다.
결국 말년에는 살림이 어려워졌다.
가난해지면서도 책은 계속 샀다.
월급을 전부 해외 직구 원서에 쓰다가 전셋값까지 책에 투자해버리는 수집가, 바로 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로 채워진 남촌의 서재는 19세기 조선에서 가장 앞선 지식 창고가 됐다.
서양 과학책, 천문학 지도, 해부학 도판이 모두 그 서재 어딘가에 꽂혀 있었다.

조선의 유학자 한 명이 해부학 도판을 펼쳐놓고 공자의 마음을 뇌에서 찾았다.
유교 전통에서 마음의 자리는 수백 년 동안 심장이었다.
공자도, 맹자도, 조선의 선비들도 그렇게 믿었다.
최한기는 그 믿음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청나라에서 들여온 서양 해부학 번역서를 근거로 삼았다.
1836년에 쓴 『신기통』, 인간과 세계를 '기'의 통로로 해석한 저작에서 그 주장을 처음 꺼냈다.
1857년에는 『기학』에 다시 못을 박았다.
그가 기록한 결론은 이거였다.
마음의 자리는 가슴이 아닌 뇌라는 것이었다.
이건 오늘날로 치면 목사가 주일 설교에 진화론을 끌어들이는 것과 비슷한 충격이었다.
유학자 사회에서 거의 이단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같은 해인 1857년, 지구와 우주를 다룬 『지구전요』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조선 학자 중 처음으로 적극 받아들였다.
지동설이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 주위를 돈다는 이론이다.
서양 천문학이 옳다고 조선의 책에 처음으로 정식 기록한 사람이 최한기였다.

그가 죽고 나서 1만 권은 팔리지도, 읽히지도 않은 채 창고로 들어갔다.
1877년, 최한기는 서울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큰 소동도 없었고, 학계의 애도도 없었다.
그의 저작 약 1,000여 종, 수천 권 분량이 20세기 중반까지 학계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19세기 당대 가장 미래지향적이었던 사상이 당시에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지금은 고전이 된 영화가 개봉 당시 흥행 참패로 끝나고 창고에서 수십 년을 기다리다 재상영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1960년대가 되어서야 박종홍, 이우성 같은 연구자들이 그의 저작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조선 기철학의 완성자"라는 평가가 붙었다.
기철학이란 세상 모든 것을 '기(氣)',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흐름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벼슬도 거부하고, 재산도 탕진하고, 이단 소리까지 들어가며 쌓은 생각들이 제자리를 찾는 데 거의 한 세기가 걸렸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그 한 세기짜리 기다림의 끝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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