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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고려 왕조를 100년간 뒤흔들 쿠데타는 뺨 한 대에서 시작됐어요.
1170년 8월, 개경 근교 왕실 별궁 보현원에서 수박 경기가 열렸어요.
수박은 오늘날로 치면 무술 시합 같은 거예요.
늙은 대장군 이소응이 경기에서 지자, 젊은 문신 한뢰가 그의 뺨을 공개적으로 후려쳤어요.
왕이 보는 앞에서, 수십 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였어요.
그 자리에 있던 하급 호위 무관 이고는 옆에 있던 두 사람, 정중부와 이의방과 눈짓을 교환했어요.
그냥 눈짓이 아니었어요.
무신들은 수십 년간 그 꼴을 보고 살아왔거든요.
글씨를 읽는다는 이유 하나로 무인들 위에 군림하던 문신들이, 검과 창을 드는 사람들을 '짐승'이라 불렀던 시대였어요.
회식 자리에서 후배가 선배를 공개적으로 망신시키는 장면 아시죠.
그 한 번이 수년간 쌓인 불만을 전부 터뜨리는 그 장면이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 불만이 수십 년치였어요.

이고가 그날 밤 외친 구호는 숙청이 아니라 절멸이었어요.
"문관의 관을 쓴 자는 서리라도 죽이고 씨를 남기지 말라."
서리는 오늘날로 치면 동사무소 말단 직원쯤 되는 거예요.
그날 밤, 세 사람은 보현원에서 왕을 따라온 문신들을 모조리 죽였어요.
수백 구의 시체가 보현원 연못에 던져졌고, 도성 안 문신 가문들까지 추적이 이어졌어요.
하룻밤 학살이었어요.
아이러니한 게 있어요.
수십 년간 "무신은 글을 모르는 짐승"이라는 조롱을 받아온 사람들이, 그날 밤 문자 그대로 "문신의 씨"를 끊으려 했다는 거예요.
오랫동안 무시당해온 팀이 인사권을 쥔 순간 전부 잘라버리는 장면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셈이에요.

왕을 지키던 경호원이 그 왕을 배에 태워 섬으로 보냈어요.
쿠데타 직후 이고는 당시 왕 의종을 거제도로 유배 보내고, 그 동생 익양공을 새 왕 명종으로 앉혔어요.
어제까지 왕의 뒤에서 창을 들고 서 있던 하급 무관이, 이틀 만에 왕을 갈아치우는 결정을 내린 거예요.
이고는 대장군에 오르고 위위경도 겸했어요.
위위경은 나라의 무기와 의장 행렬을 관리하는 장관직이에요.
그렇게 정중부, 이의방과 함께 고려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세 사람 중 하나가 됐어요.
로비에서 명함을 받던 경비원이 한 주 만에 회장실에 앉아 임원 인사를 결재하는 상황이에요.
하지만 권력을 셋이서 나눠야 한다는 건, 뒤집어 말하면 서로가 서로의 경쟁자라는 뜻이기도 했어요.
이고는 셋 중에 가장 먼저 그 사실을 행동으로 옮겼어요.

문신을 벤 칼은 아직 빛을 잃지 않았는데, 그 칼이 이번엔 이고를 향했어요.
쿠데타 성공 후 불과 5개월 만인 1171년 1월, 이고는 법운사 승려들과 불량배들을 끌어모아 정중부와 이의방을 없애려는 계획을 세웠어요.
법운사는 개경 안에 있던 절이에요.
그런데 계획이 새어 나갔어요.
이의방이 먼저 움직였어요.
연회 자리에서 자신의 부하를 시켜 철퇴, 즉 쇠몽둥이로 이고를 쳐 죽였어요.
아무리 봐도 이 결말에는 씁쓸한 게 있어요.
한 날 한 밤에 같은 목적으로 칼을 들었던 동료가, 5개월 뒤 몽둥이를 들고 돌아선 거니까요.
창업 동지들이 지분을 놓고 싸우다 한 명이 쫓겨나는 장면인데, 여기서 쫓겨남은 곧 죽음이었어요.
이고는 문신의 씨를 말리자고 외쳤지만, 결국 그 씨를 말린 건 같은 무신의 손이었어요.
그것도 그가 함께 칼을 들었던 바로 그 손이었어요.
권력을 함께 쥔 손은 언제라도 서로를 향할 수 있다는 것, 이고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던 걸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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