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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훗날 송대 성리학의 네 기둥 중 하나로 불릴 이 청년은 스물한 살 때 책상에 병법서를 쌓아두고 국경 의용군을 모집하러 다녔어요.
1040년 무렵, 젊은 장재(張載)는 서하(西夏)라는 이민족 국가가 송나라 서북쪽 땅을 빼앗은 것에 분노하고 있었어요.
서하는 지금의 중국 감숙성과 닝샤 일대를 장악한 신흥 세력이었고, 송나라 입장에서는 국경이 뚫린 상황이었죠.
장재는 민간 의용군을 직접 조직하겠다는 계획서를 들고 변방 방어 책임자를 찾아갔어요.
그 사람이 범중엄(范仲淹)이었는데, "근심은 남보다 먼저, 즐거움은 남보다 나중에"라는 구절로 유명한 「악양루기」를 쓴 송나라의 명재상이었죠.
범중엄은 계획서를 다 읽었어요.
그리고 칭찬 대신 『중용』 한 권을 건네며 말했어요.
"유학자는 공부만으로도 충분히 할 일이 있어요(儒者自有名教可樂)."
계획서를 찢어버린 것도 아니었고 호통을 친 것도 아니었어요.
그저 책 한 권을 쥐여주고 조용히 돌려보낸 거예요.
20대 초반에 "이것만이 내 길이다"라고 확신했다가 존경하는 어른의 한마디에 진로를 통째로 꺾어본 경험이 있다면, 이 장면이 낯설지 않을 거예요.
장재는 그 길로 병법서를 덮고 유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40년 후, 그는 중국 철학사를 다시 쓰게 됩니다.

장재는 자기 서재 서쪽 벽에 272자를 걸었고, 그것이 이후 천 년간 동아시아 지식인의 인용 1순위가 됐어요.
그 글이 『서명(西銘)』이에요.
'서쪽 벽의 명문'이라는 뜻으로, 제목 그대로 자기 서재의 서쪽 벽에 걸어둔 글이었죠.
내용은 이렇게 시작해요. "하늘은 내 아버지, 땅은 내 어머니, 나는 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문장이 반전이에요.
"백성은 내 형제요, 만물은 내 동료다(民吾同胞, 物吾與也)."
11세기 중국이었어요.
혈연과 신분이 곧 우주의 질서라고 믿던 시대였죠.
그 시대에 장재는 거지와 황제, 돌멩이와 소가 한 가족이라고 272자로 선언한 거예요.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다"는 요즘 SNS 감성이 천 년 전 한 학자의 서재에 붓글씨 족자로 걸려 있었던 셈이에요.
이 글은 이후 주희와 정이 같은 신유학의 거장들이 핵심 경전으로 삼았고, 천 년 동안 동아시아 곳곳에서 인용됐어요.

장재는 논문으로만 말하는 학자가 아니었어요.
그는 자기 돈으로 논을 사서 주나라 사람들이 땅을 나누던 그 선을 직접 흙 위에 그었어요.
만년에 장재는 고향인 섬서성 횡거(橫渠)로 내려갔어요.
그리고 자기 돈으로 농지를 구입해 정전제(井田制)를 실제로 실험했어요.
정전제는 주나라(기원전 11세기 무렵)에서 운영했다고 알려진 토지 제도로, 논을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9칸으로 나눠 8가구가 각자의 칸을 경작하고 가운데 칸은 공동으로 국가에 납부하는 방식이에요.
1,500년 전 사라진 제도를 자기 논에서 직접 되살려낸 거예요.
제자들과 함께 밭에 금을 그었고, 그 실험 기록은 저서 『경학이굴(經學理窟)』에 남아 있어요.
경학이굴은 '경전 해석의 동굴'이라는 뜻으로, 장재가 유학 경전을 파고든 연구 기록들을 모은 책이에요.
현대로 치면 "고대 경제학이 실제로 작동하는지 직접 해보자"며 사비로 땅을 산 연구자예요.
역사 유튜버가 '로마식 농법이 지금도 되나?' 하며 집 마당에서 실험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장재는 전 재산을 걸었어요.

오늘날 베이징의 지도자들이 연설에서 암송하는 그 네 문장을 쓴 사람은, 1077년 겨울 임동의 허름한 여관방에서 제자들이 돈을 모아 겨우 장례를 치른 인물이에요.
그 네 문장이 횡거사구(橫渠四句)예요.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백성을 위해 명을 세우고, 지난 성인을 위해 끊긴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연다(爲天地立心, 爲生民立命, 爲往聖繼絶學, 爲萬世開太平)."
지금도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공개 석상에서 인용하는 문장이에요.
장재는 말년에 왕안석(王安石)의 개혁 협력 요청을 거절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왕안석은 당시 황제의 신임을 받아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신법 개혁을 밀어붙이던 재상이었는데, 장재는 그 방향에 동의하지 않았죠.
1077년, 병든 몸으로 다시 조정에 불려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쓰러졌어요.
섬서성의 작은 역참 마을 임동(臨潼)의 여관방이었어요.
동행은 조카 한 명뿐이었고, 관을 살 돈조차 없어 제자들이 급히 돈을 모았어요.
수십억 명이 액자에 걸어두는 명언을 쓴 사람이 정작 본인의 장례비도 없이 길에서 쓰러진 거예요.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연다"고 썼던 사람의 마지막이 이랬다는 것, 어쩌면 그것 자체가 그의 철학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증명하는 게 아닐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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