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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그의 외투 주머니에서 파리행 기차표가 나왔다.
단 한 번도 개찰되지 못한 채로.
1960년 1월 4일, 알베르 카뮈는 파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기차 대신 친구의 차를 탔다.
출판사 사장 미셸 갈리마르가 "같이 가자"고 했고, 카뮈는 기차표를 주머니에 넣은 채 조수석에 올랐다.
파리 남쪽 100킬로미터 지점, 빌블르뱅의 도로에서 파셀 베가 승용차가 도로변 나무를 들이받았다.
카뮈는 즉사했다. 향년 46세.
그런데 그가 남긴 말 하나가 이 죽음을 더 아프게 만든다.
그는 평소 이렇게 말해왔다.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무의미한 죽음은 없다."
부조리를 평생 글로 써온 사람이 가장 부조리한 방식으로 죽은 것이다.
부조리란 이런 개념이다.
우리는 "왜 사는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묻는데, 세상은 아무 대답도 돌려주지 않는다.
그 침묵과 질문 사이의 충돌, 의미를 원하는 인간과 의미를 주지 않는 세계 사이의 어긋남이 부조리다.
그런 사람이 가장 우연하고 가장 무의미한 방식으로, 쓰지 못한 기차표를 주머니에 넣은 채 세상을 떠났다.

카뮈가 평생 가장 그리워한 자리는 노벨상 시상대가 아니라 골문 앞 6야드 박스였다.
1913년, 그는 프랑스령 알제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카뮈가 한 살이 되던 해 1차 세계대전 전선에서 전사했다.
글자를 읽지 못하는 어머니가 남의 집 가정부로 일하며 그를 키웠다.
그런 카뮈가 빠져든 것이 축구였다.
알제대학 팀 RUA의 골키퍼였는데, 그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훗날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인간의 의무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축구에서 배웠다."
책이 아니라 경기장에서 도덕을 배운 것이다.
그런데 17살에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폐결핵은 폐를 서서히 망가뜨리는 병이라 격렬한 운동이 불가능해진다.
골문 앞에 서던 소년은 갑자기 그라운드 밖으로 밀려났다.
그 빈자리를 책이 채웠다.
알제리의 가난한 골키퍼 소년이 20세기 가장 중요한 철학자가 된 것은 그렇게 뜻하지 않게 시작됐다.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카뮈는 그 사실을 점령된 파리의 인쇄소에서 증명했다.
1942년 카뮈는 소설 <이방인>과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를 동시에 출간했다.
<이방인>은 아무 이유도 없이 살인을 저지른 뒤 법정에서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는 남자의 이야기다.
<시지프 신화>는 이 질문을 철학으로 따진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왜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그 책들을 쓰던 바로 그 시기, 카뮈는 동시에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독일 점령기 파리에서 레지스탕스 지하신문 <콩바>의 편집장을 맡아 가명으로 매일 밤 신문을 찍고 있었다.
콩바는 프랑스어로 '저항'을 뜻하는데, 발각되면 즉결 처형이었다.
"삶은 무의미하다"고 쓴 철학자가 동시에 목숨을 걸고 나치에 맞서고 있었다.
이게 모순처럼 보이지만, 카뮈에게는 모순이 아니었다.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행동하는 것, 그게 그의 철학의 실천이었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하면서도 매일 새벽 자원봉사를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카뮈가 말한 삶의 방식과 가장 가깝다.

노벨상 발표가 있던 그날, 카뮈는 이미 좌우 양 진영 모두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혀 있었다.
1957년, 그는 44살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역대 두 번째로 어린 수상자였다.
하지만 그 영광 뒤에 따가운 압박이 있었다.
당시 알제리 독립전쟁이 한창이었다.
알제리는 카뮈가 자란 땅이었고, 어머니가 아직 살고 있는 곳이었다.
세상은 카뮈에게 입장을 정하라고 했다. 프랑스 편이냐, 알제리 독립 세력 편이냐.
카뮈는 양쪽 모두 거부했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도 틀렸고, FLN이라는 알제리 무장 독립 세력의 무차별 폭탄 테러도 틀렸다고 했다.
FLN은 민간인이 가득한 시내에 폭탄을 놓는 방식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던 단체였다.
스톡홀름 시상식 직후, 한 알제리 학생이 그에게 따져 물었다.
카뮈의 답은 이랬다. "지금도 알제 시내 전차에 폭탄이 놓일 수 있어요. 그 폭탄이 내 어머니를 칠 수도 있고. 나는 정의를 믿지만, 정의 이전에 어머니를 지키겠습니다."
이 한 문장이 그를 양쪽 모두에게서 추방했다.
한때 가장 가까운 지식인 동료였던 장폴 사르트르와도 1952년 이미 결별한 상태였다.
사르트르는 명확한 정치적 입장을 고르는 사람이었고, 카뮈는 그러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며 갈라섰다.
SNS에서 양쪽 진영이 동시에 입장을 밝히라고 압박할 때 "내 가족이 먼저다"라고 답하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잘 안다.
카뮈는 그 대가를 치렀다.
그러면서도 그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3년 후, 그 어머니가 살아있는 알제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주머니 속 기차표를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가장 부조리한 철학자가 가장 부조리한 방식으로. 과연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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