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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하루만 더 기다렸다면, 발터 벤야민은 살아서 뉴욕에 닿았을 거예요.
1940년 9월 26일, 벤야민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포르부에 도착해요.
포르부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에 있는 작은 어촌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탈출하려는 유대인 난민들이 이 험한 산길을 많이 지나던 곳이에요.
그런데 그날 스페인 국경 수비대가 선언해요.
"통과 비자 없는 난민은 프랑스로 돌려보낸다."
프랑스로 돌아가면 나치에게 넘겨지는 것과 다름없었어요.
그날 밤, 벤야민은 호텔 '프란시아'의 방에서 모르핀을 과다복용했어요.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국경이 다시 열렸어요.
함께 피레네를 넘었던 동행자 전원이 아무 문제 없이 리스본으로 빠져나갔어요.
공항 게이트에서 탑승 거부를 당했는데 내일 아침이면 규정이 바뀔 줄 모르고 포기해버린 상황이에요.
역사는 종종 이런 식으로 잔인해요.

벤야민의 유품 목록은 단 일곱 단어였어요.
"검은 가죽 가방 하나, 내용물 불명."
피레네를 넘는 내내, 벤야민은 안내인 리자 피트코에게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어요.
리자 피트코는 반파시스트 활동가로, 위험한 산길을 통해 난민들을 국경 너머로 이끌던 사람이에요.
"이 원고가 내 목숨보다 중요해요."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서도 그 무거운 검은 가방을 한시도 놓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후 포르부 경찰이 작성한 유품 목록에는 '검은 가죽 가방 하나'만 기록되어 있어요.
내용물은 끝내 적히지 않았고, 가방은 그 이후 발견되지 않았어요.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지금도 아무도 몰라요.
벤야민이 13년간 집필하던 미완의 대작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새 버전이었을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유작이었을 수도 있어요.
오늘날로 치면 박사논문 전부가 든 노트북을 누군가가 가져가 버린 것과 같은데, 그 파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거예요.

벤야민을 거절한 교수들의 이름을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요.
1925년,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제출해요.
독일에서 대학 교수가 되려면 박사학위 외에 '교수 자격 논문'이라는 두 번째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걸 하빌리타치온이라고 해요.
오늘날로 치면 박사를 딴 뒤에 또 한 번 더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시스템이에요.
심사위원들의 판정은 간결했어요.
"이해할 수 없다."
논문은 반려됐고, 벤야민은 평생 대학 교수직을 얻지 못했어요.
결국 그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이끌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서 받는 월 500프랑의 연구비로 살아야 했어요.
그 돈으로 1927년부터 13년 동안 파리 국립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썼어요.
19세기 파리의 유리 지붕 상가 거리를 사회·역사적으로 분석하는 이 책은, 그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포르부에서 죽었어요.
그런데 결말이 황당해요.
거절당한 그 논문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지금 20세기 가장 중요한 미학 저작 중 하나로 읽혀요.
미완성으로 출판된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천 페이지가 넘는 고전이 됐어요.

벤야민이 어디를 가든 함께 들고 다닌 그림은, 지금 그가 끝내 가지 못한 예루살렘에 있어요.
1921년, 벤야민은 스위스 출신 모더니즘 화가 파울 클레의 수채화 한 점을 1000마르크에 샀어요.
제목은 《Angelus Novus》, '새로운 천사'라는 뜻이에요.
A3 크기 정도의 작은 그림이에요.
그는 이 그림을 베를린, 파리, 마르세유, 피레네로 이어지는 모든 망명길에 챙겼어요.
이사를 수없이 다녀도 꼭 들고 다니는 낡은 액자 하나가 있다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 거예요.
벤야민에게 이 그림은 그런 물건이었어요.
사망하기 몇 달 전, 그는 《역사 철학 테제》에서 이 천사를 이렇게 묘사했어요.
《역사 철학 테제》는 역사와 진보에 대한 벤야민의 마지막 성찰을 담은 글이에요.
"등을 미래로 향한 채, 발 앞에 쌓이는 과거의 폐허를 바라보며 폭풍에 떠밀려 가는 존재."
그 글을 쓴 지 몇 달 뒤, 벤야민 자신이 역사의 폭풍 속으로 사라졌어요.
그림은 살아남았어요.
벤야민이 미리 절친한 친구 게르숌 숄렘에게 맡겼기 때문이에요.
숄렘은 유대 신비주의를 연구한 학자이자 벤야민의 오랜 친구였어요.
지금 《Angelus Novus》는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에 걸려 있어요.
천사는 여전히 등을 미래로 향한 채, 지금도 뒤를 바라보고 있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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