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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맑은 하늘 아래서도 그는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끌었어요.
40년간, 단 하루도 이 차림을 바꾸지 않았어요.
왕부지(王夫之, 1619~1692)가 이 고집을 부린 이유는 단 하나였어요.
"머리는 청나라 하늘에 닿지 않고, 발은 청나라 땅을 밟지 않는다."
대나무 삿갓은 하늘을 막고, 나막신은 땅을 막아주는 장치였어요.
오늘날로 치면 이런 거예요.
특정 기업 제품을 안 쓰는 게 아니라, 그 기업 로고가 보이는 공간은 일부러 돌아가는 사람.
그걸 매일 40년째 하는 거예요.
왕부지에게 복장은 저항의 선언이었어요.
철학자의 논문이 아니라, 매일 아침 옷을 입는 순간 자체가 정치적 행위였죠.
1648년, 왕부지는 책상을 버리고 창을 들었어요.
그러나 그 전쟁이 패배한 순간, 그의 진짜 싸움이 시작됐어요.
왕부지는 원래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평범한 선비였어요.
경전을 읽고, 글을 쓰고, 시험을 치르는 게 그의 길이었어요.
하지만 1644년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하면서 그 길이 통째로 사라졌어요.
29세의 왕부지는 고향 호남의 형산(衡山) 일대에서 반청 의병에 가담했어요.
형산은 유교 성인들이 수양하던 성지로, 조선으로 치면 태백산 같은 상징적 의미가 있는 산이에요.
조용히 책 읽던 대학원생이 어느 날 시위 최전선에 나서 경찰에 쫓기는 상황이라고 보면 딱 맞아요.
군대는 이듬해 궤멸했어요.
왕부지는 살아남았지만, 이제 어디도 갈 곳이 없었어요.
그 막힌 자리에서 그는 붓을 들었어요.

그는 독자가 없을 것을 알면서도 썼어요.
원고를 묻어둘 구덩이를 미리 파둔 사람처럼.
1650년대부터 왕부지는 형양(衡陽)의 석선산(石船山) 아래에 숨었어요.
석선산은 '돌로 된 배 모양의 산'이라는 뜻이에요.
그는 거기에 상서당(湘西草堂)이라는 초가집 하나를 짓고 들어갔어요.
출판할 곳도, 읽어줄 독자도 없었어요.
청나라 치하에서 반청 사상을 담은 책을 공개하면 목숨이 날아가니까요.
그래서 그는 그냥 썼어요.
조회수 0인 블로그에 매일 2천 자씩 10년을 쓰는 사람을 떠올려 보세요.
왕부지는 그걸 40년 했어요.
《독통감론(讀通鑑論)》, 《장자정몽주(張子正蒙注)》를 포함해 약 400권 분량의 원고가 그렇게 쌓였어요.
《독통감론》은 사마광이 쓴 역사서 《자치통감》을 다시 읽으면서 왕부지 자신의 생각을 붙인 책이에요.
거기서 그는 계속 물었어요.
"나라는 왜 망하는가? 역사는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그는 이런 말을 남겼어요.
"내가 쓴 글이 백 년 뒤에라도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백 년 뒤'가 실제로 170년이 될 줄은, 그도 몰랐겠지만요.

왕부지의 책을 세상에 꺼낸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를 지킨 장군의 동생이었어요.
1692년, 왕부지는 가난 속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원고는 후손의 집 구석에 방치됐어요.
170년 넘는 세월 동안 아무도 꺼내보지 않았어요.
그러다 1865년, 역사적 역설이 일어났어요.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해 청나라를 구한 장군 증국번(曾國藩)의 동생 증국전(曾國荃)이 왕부지의 유고를 정리해 《선산유서(船山遺書)》 288권으로 펴낸 거예요.
평생 반대해온 대기업의 후계자가 내가 죽은 뒤 내 유작을 직접 돈 들여 출판해주는 상황이에요.
그 이유는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왕부지의 글이 세상에 나오자, 근대 개혁가들이 달려들었어요.
량치차오, 담사동 같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무기로 삼아 중국 변혁을 꿈꿨어요.
왕부지는 죽고 170년 뒤에 자기 독자를 만났어요.
"백 년 뒤에 누군가를 만난다면 충분하다"고 했던 그 말은 결국 옳았어요.
당신이라면 독자 없이 40년을 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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