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송나라로 간 고려 왕자는 정식 사절이 아니었다.
상인 배에 몰래 올라탄 30살 승려였다.
1085년 4월, 의천은 형 선종에게 몇 번이나 출국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왕자가 외국에 나간다는 건 납치나 외교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었다.
허락이 날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자 두 명만 데리고 황해도 개풍의 정주 포구로 향했다.
거기서 기다리던 건 송나라 상인 임녕의 배였다.
배가 파도 위로 나간 뒤에야 모후와 형이 "제발 돌아오라"는 서신을 연달아 보냈지만, 배는 이미 황해를 가르고 있었다.
반전은 여기서 나온다.
고려 제일의 신분이 오히려 그를 가둔 새장이 됐던 거다.
왕자라서 출국 허가가 나지 않았고, 왕자라서 더 몰래 떠나야 했다.
오늘날로 치면 대기업 회장 아들이 아버지 몰래 유학 가겠다고 화물선 구석 자리를 예약한 상황이다.

밀항자로 떠난 왕자는 송나라에서는 국빈이었다.
송 철종은 의천이 도착하자마자 그를 수도 개봉의 계성사에 머물게 했다.
가출한 학생이 도착한 학교에서 총장이 직접 맞이하고 도서관 열쇠를 내어준 것과 같다.
황제가 직접 환영 준비를 갖춘 셈이니, 밀항이 갑자기 국빈 방문이 된 거다.
의천은 14개월 동안 개봉, 항주, 천태산을 돌아다니며 정원, 종간을 비롯한 50여 명의 고승을 만났다.
정원은 화엄종의 당대 최고 스승이고, 종간은 천태종의 대표 학자였다.
화엄종은 "모든 존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관을 중심에 두는 불교 흐름이고, 천태종은 경전 공부와 명상을 함께 강조하는 종파다.
귀국할 때 배에 실어온 것이 송나라, 요나라, 일본에서 수집한 불교 서적 3천여 권이었다.
몰래 떠난 유학이 국가급 학술 교류가 되어 돌아온 거다.

중국 불교의 주석서 절반은 중국이 아니라 고려의 목록에 살아남았다.
귀국한 의천은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했다.
교장도감은 불교 경전과 주석서를 수집하고 정리해 간행하는 국가 기관이다.
그리고 1090년,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편찬했다.
이름이 길지만 쉽게 말하면 동아시아 불교 주석서 전체 목록이다.
이 목록을 바탕으로 4,740여 권의 교장을 간행했는데, 교장이란 불교 경전을 해설한 주석서 모음이다.
문제는 이 책들이 나중에 중국 본토에서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도서관이 불타 없어진 뒤, 옆 나라 사서가 적어둔 대출 목록이 유일한 증거가 된 상황과 같다.
의천의 목록이 없었다면 오늘날 연구자들은 그 책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한 왕자 승려의 꼼꼼한 기록이 동아시아 사상사의 빈칸을 채운 거다.

의천의 마지막 상소는 경전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화폐 발행 요청이었다.
1097년, 의천은 숙종에게 주전론을 올렸다.
주전론은 금속으로 화폐를 만들어 유통하자는 경제 제안서다.
이듬해 해동통보와 삼한통보가 실제로 발행됐다.
그뿐 아니라 그는 천태종을 고려에서 새롭게 일으켜 세우려 했다.
당시 불교계는 교종과 선종으로 날카롭게 갈라져 있었다.
교종은 경전 공부를, 선종은 참선(앉아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수행)을 중시하며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의천은 그 갈라진 틈을 메우고 싶었다.
하지만 종파 통합도, 화폐 개혁의 완성도, 둘 다 그의 생전에 끝나지 않았다.
1101년, 의천은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꿈꾼 통합은 미완으로 남았고, 화폐 개혁의 씨앗도 다른 사람 손에서 피었다.
한밤중 상인 배에 올랐던 그 30살 승려가 남긴 질문들은, 아직도 불교학자들의 책상 위에 쌓여 있다.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