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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서른다섯의 홍대용은 하인에게 시키지 않았어요.
자기 손으로 혼천의(渾天儀)를 깎았어요.
혼천의는 지구와 태양, 달의 궤도를 금속 고리로 표현한 천체 모형 기구예요.
홍대용은 1760년대 충청도 수촌 자택에 농수각(籠水閣)이라는 개인 천문 관측소를 짓고, 혼천의와 자명종을 직접 만들어 별의 움직임을 기록했어요.
문제는 그가 양반이었다는 거예요.
당시 양반의 본업은 경전 암기와 과거 시험이었고, 손으로 기계를 만지는 건 장인이나 하인의 일이었어요.
오늘날로 치면 국문학과 교수가 망원경 자동 돔 천문대를 자기 집 옥상에 직접 조립해 올리는 장면이에요.
학문적 신분과 직종, 두 선을 동시에 넘는 행동이었죠.
그는 책으로 배운 천문학이 아니라 별의 실제 움직임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요.
손이 닿아야 알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거든요.

1766년 2월의 베이징 뒷골목 책방에서, 조선 선비 한 명이 한족 선비 셋과 마주 앉아 60일 동안 붓만 움직였어요.
홍대용은 1765년 겨울, 작은아버지 홍억이 청나라 사절단 일원으로 가는 길에 수행원 자격으로 따라갔어요.
그리고 베이징의 서점가이자 골동품 거리인 유리창(琉璃廠)에서 항주 출신 선비 엄성·반정균·육비를 우연히 만났어요.
말이 통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붓을 들었어요.
두 언어로 읽히는 한자로 쓰고 또 쓰는, 소리 없는 대화가 60일간 이어졌어요.
귀국 후에도 10여 년간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그 기록이 『건정동필담(乾淨衕筆談)』과 『항전척독(杭傳尺牘)』이라는 두 권의 책으로 남아 있어요.
해외 출장 한 번 다녀와서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10년 넘게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상상해보세요. 배 한 번, 파발 한 번에 몇 달이 걸리던 시대에 벌어진 일이에요.
당시 조선 사대부들은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봤어요.
만주족이 세운 왕조였으니까요.
하지만 홍대용은 한족 선비들을 "형제"라고 불렀고, 엄성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직접 제문까지 올렸어요.
그에게 국경은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되지 못했어요.

지구가 돈다고 쓴 것은 오히려 문제가 아니었어요.
진짜 문제는 그 다음 문장이었어요.
귀국 후 홍대용은 『의산문답(毉山問答)』을 썼어요.
관념 속에서만 사는 유학자 허자(虛子)와 실체를 꿰뚫어보는 도인 실옹(實翁)이 대화하는 형식이에요.
'의무려산에서 주고받은 문답'이라는 뜻으로, 허구의 인물을 빌려 자기 생각을 드러낸 글이에요.
실옹의 입을 통해 그는 이렇게 썼어요.
"지구는 하루 한 번 스스로 돌고, 우주는 무한하며 중심이 따로 없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번역한 과학서를 일부 접하긴 했지만, 무한우주론과 그 정치적 함의까지는 스스로 밀고 간 논리였어요.
왜 이게 폭탄이었을까요.
당시 조선의 세계관은 화이론(華夷論) 위에 서 있었어요.
중국을 문명의 중심에 두고 나머지는 변방이라는 논리였죠.
조선은 스스로를 '작은 중화', 즉 소중화(小中華)라 불렀어요.
이건 단순한 자기 겸손이 아니라 외교와 문화 정책 전체를 떠받치는 국가 논리였어요.
"우주에 중심이 없다"는 말은 그 논리 자체를 뿌리째 흔드는 선언이었어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듯 어느 나라도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말, 지금은 당연하게 들리죠.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 이 한 문장은 나라의 존립 논리를 거부하는 발언이었어요.
천문학 책이 아니라 정치적 폭발물이었던 거예요.

홍대용이 죽은 해, 박지원은 친구의 묘지명을 직접 쓰고 자리에 돌아와 『열하일기』를 이어 써 내려갔어요.
만년의 홍대용은 태인 현감, 영천 군수를 지냈어요.
지방 행정 관리로 삶을 마친 거예요.
1783년, 쉰두 살에 세상을 떠났어요.
하지만 그의 사랑방에는 낯익은 이름들이 드나들었어요.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들은 훗날 북학파(北學派)로 묶이는 사람들이에요.
북학파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 실학자 그룹인데, 그 씨앗 중 하나가 홍대용의 사랑방에서 뿌려졌어요.
우주의 중심을 부정한 사람이 공식 기록 안에서는 지방 수령으로 삶을 마쳤어요.
제도는 끝내 그의 아이디어를 품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의 사랑방에서 함께 앉았던 후배들이 그 논리를 들고 나가 조선 지식계를 바꿔놓았죠.
회사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중간 관리자지만 퇴근 후 사람들을 모아 업계의 다음 지도를 그리는 인물 있잖아요.
홍대용의 영향력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했어요.
직함이 아니라, 함께 앉았던 사람들에게서 나왔어요.
박지원이 그 묘지명을 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지 않나요.
제도가 품지 못한 사람을 사람이 품는다는 것, 그게 어쩌면 홍대용이 평생 믿었던 방식이었는지도 몰라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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