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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감옥에 들어간 그는 변호사조차 거부했어요.
재판을 받는 순간, 독립선언이 거짓말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1919년 3월 1일, 한용운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했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죠.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간 그는 세 가지를 선언해요.
변호사 선임 거부, 사식 반입 거부, 보석 신청 거부.
이것이 그의 '옥중 3원칙'이에요.
그 논리는 단순했어요.
"일본이 세운 법정에서 나를 변호하는 순간, 나는 그 법정의 권위를 인정하는 거야."
일본 법원에서 재판받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독립선언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였던 거예요.
경찰서에 끌려가 "변호사 부를게요?"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해봐요.
그런데 "당신들의 법으로는 나를 재판할 수 없어"라고 답한다면?
그게 한용운이 선택한 방식이었어요.
저항은 거리에서만 하는 게 아니었어요.
법정에서도, 감방에서도 계속되어야 했죠.

일제강점기 한복판에서 그가 내놓은 책은 독립운동 선언문이 아니라 연애시집이었어요.
1926년 출간된 『님의 침묵』은 표면적으로 보면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는 88편의 시예요.
그런데 이 시집을 읽은 사람들은 금방 알아챘어요.
"님"이 단순한 연인이 아니라는 걸.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이 한 문장에서 '님'은 부처이자, 조국이자,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동시에 세 가지 의미를 품은 단어였죠.
오늘날로 치면 이런 상황이에요.
특정 단어를 쓰면 계정이 삭제되는 나라에서, 사랑 노래 가사 안에 정치적 메시지를 숨겨 넣는 가수의 전략.
검열관의 눈을 피하면서도 독자에게 이중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어의 유격전이었어요.
독립운동가이자 승려가 가장 정치적인 시기에 내놓은 책이 연애시집의 외양을 하고 있었다는 반전.
그리고 그 시집이 지금도 한국 현대시의 기점으로 평가받는다는 사실.
한용운은 싸우는 방식마저 시(詩)였어요.

그는 집을 짓되, 총독부가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앉혔어요.
현관을 열 때마다 조선이 식민지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죠.
1933년 서울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어요.
지금도 서울시 지정 기념물로 남아 있는 이 한옥은 시작부터 범상치 않았어요.
한옥의 기본은 남향인데, 한용운은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앉혔거든요.
이유는 단 하나였어요.
남쪽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싫어하는 상사가 있어서 책상을 돌려 앉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봐요.
하지만 한용운은 그걸 평생 살 집의 구조로 만들었어요.
매일 아침 방문을 열면 총독부를 등지게 되는 구조였죠.
총칼을 들지 않아도 저항할 수 있다는 걸, 그는 건축의 방향 하나로 보여줬어요.
아주 조용하지만, 절대 꺾이지 않는 방식으로요.

해방이 1년 앞으로 다가온 1944년 여름, 그는 조선총독부의 쌀을 끝내 받지 않고 굶어 죽었어요.
창씨개명을 끝내 거절했고, 일제가 배급하는 쌀도 받지 않았어요.
조선총독부가 발행하는 호적에도 오르지 않았어요.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숨을 거뒀죠.
해방은 딱 1년 2개월 뒤였어요.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는 건 용기 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그 거부의 대가가 월급이 아니라 밥이라면, 그 선택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조금만 더 타협했다면, 그는 살아서 독립을 봤을 거예요.
하지만 한용운은 타협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는 해방된 조국의 하늘을 끝내 보지 못했죠.
그게 더 슬픈지, 더 위대한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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