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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했을 때, 그는 어느 대학의 교수도 아니었다.
베른 특허청의 말단 서기였다.
특허청이라는 곳은 발명품 특허를 심사하는 공무원 조직이다.
아인슈타인은 대학 졸업 후 조교 자리를 구하지 못해 26살에 이곳에 들어갔다.
그의 공식 직함은 '3등 기술심사관'이었다.
그런데 1905년 한 해 동안 그는 논문 네 편을 연달아 발표했다.
빛이 파동이 아니라 알갱이처럼 행동한다는 이론(광전효과), 꽃가루가 물 위에서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원리(브라운 운동),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특수상대성이론, 그리고 질량이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는 공식 E=mc²까지.
물리학 교과서 네 챕터가 한 사람의 손에서, 퇴근 후 여가 시간에 써진 셈이다.
이 중 광전효과는 16년 뒤 노벨 물리학상으로 돌아왔다.
아카데미아에서 거절당한 말단 공무원의 글이 전부 교과서에 실린 것이다.
물리학계는 1905년을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서명한 문장 두 장을 평생 후회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은 그 두 장에서 시작됐다.
1939년 8월, 헝가리 출신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가 아인슈타인을 찾아왔다.
실라르드는 나치 독일이 우라늄 핵분열 연구를 진행 중이라는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들이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면 전쟁의 결과는 뻔했다.
그래서 실라르드는 편지를 썼다.
미국도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었고, 아인슈타인의 서명이 필요했다.
아인슈타인은 서명했고, 편지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그 편지가 맨해튼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됐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해 극비로 진행한 계획이다.
6년 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위에서 그 결과물이 터졌다.
아이러니한 건 두 가지다.
평생 평화주의자였던 그의 서명이 도시 하나를 지웠다.
그리고 정작 그는 프로젝트에 참여조차 못했다. FBI가 그를 보안 위험으로 분류해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말년에 이렇게 말했다.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보낸 건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어."
그는 서명만 했을 뿐이지만, 결국 그 두 장이 평생의 짐이 됐다.

한 나라가 당신에게 대통령직을 제안한다.
아인슈타인은 하루 만에 답장을 썼다. 거절이었다.
1952년 11월,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 하임 바이츠만이 사망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후임으로 아인슈타인에게 공식 제안을 보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유대인이었고, 이스라엘 건국을 공개적으로 지지해온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거절서에 이렇게 썼다.
"저는 자연을 이해할 줄은 알지만, 사람을 다루는 일은 모릅니다."
대단한 영광이지만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단지 귀찮아서 거절한 게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이스라엘의 정책, 특히 팔레스타인 아랍인을 다루는 방식에 공개적으로 비판적이었다.
가장 유명한 지지자였지만, 동시에 가장 불편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이 죽은 지 일곱 시간 만에 한 병리학자가 그의 뇌를 들고 병원을 나섰다.
그는 40년 동안 돌려주지 않았다.
1955년 4월 18일, 아인슈타인은 뉴저지 프린스턴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당직이었던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는 가족의 허락도 없이 뇌를 꺼냈다.
그리고 240조각으로 잘라 포르말린 용액에 담았다.
하비는 얼마 뒤 병원에서 해고됐다. 하지만 뇌는 반환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집 지하실의 쿠키 통과 맥주용 냉장고에 넣어 수십 년을 보관했다.
이혼을 하고, 직장을 잃고, 전국을 떠돌면서도 뇌가 든 유리병은 항상 차 트렁크 안에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뇌가 공식 연구기관이 아닌 미국 시골집 찬장 안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98년, 하비는 프린스턴 대학병원에 뇌를 반환했다.
왜 그렇게 오래 붙들고 있었는지, 그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은 지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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