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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족은 아들의 진로를 막기 위해 납치를 선택했어요.
1244년, 스무 살 안팎의 토마스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합니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탁발 수도회였는데, 탁발이란 말 그대로 음식과 돈을 구걸하며 사는 삶이에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아들이 거지처럼 살겠다고 나선 거였어요.
형들이 길목에서 그를 붙잡아 가문의 성으로 데려갔고, 꼬박 1년 넘게 가뒀습니다.
가족은 온갖 방법으로 설득을 시도했어요.
그래도 토마스가 꿈쩍하지 않자, 젊은 여성을 방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토마스는 벽난로에서 불타는 장작을 집어 들고 그녀를 내쫓았다고 전해져요.
1년이 지나 풀려난 토마스는 곧장 수도원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족의 계획도, 1년간의 감금도, 아무것도 그의 방향을 바꾸지 못했어요.

파리 대학교 동료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은 '벙어리 황소'였어요.
덩치는 크고, 말은 없고, 움직임은 느렸거든요.
지금으로 치면 강의실에서 말 한마디 없이 앉아 있는 뚱뚱한 동기에게 붙이는 조롱 섞인 별명이에요.
토마스는 수업 중에도 거의 침묵을 지켰습니다.
학생들 눈에는 그저 둔해 보였죠.
그런데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달랐어요.
알베르투스는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학자였는데, 강의 시간에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벙어리 황소가 언젠가 온 세상을 울부짖음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어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가 됩니다.
조용했던 황소가 진짜로 포효한 거예요.

아퀴나스가 신학에 혁명을 일으킨 무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경계하던 책들이었어요.
13세기 유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위험한 사상가 취급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 신이 아닌 이성과 관찰로 세상을 설명하려 했어요.
신앙을 '믿음'으로 붙드는 교회 입장에서는 '이성'을 앞세우는 이 사상이 몹시 불편했던 거죠.
당시 많은 신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믿음과 이성은 아예 다른 영역이다. 섞으면 안 된다."
하지만 토마스는 반대로 물었습니다.
"이성으로 믿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가져와 신의 존재와 기독교 교리를 철학적으로 증명하려 했어요.
그 결과물이 『신학대전』입니다.
쉽게 말해, 기독교 교리를 논리로 재정리한 백과사전이에요.
분량이 어마어마해서 지금도 완독한 사람이 드물 정도인데, 금지된 철학으로 신학을 오히려 단단하게 세운 셈이었습니다.

1273년 12월, 토마스 아퀴나스는 갑자기 붓을 내려놓았어요.
그리고 평생 다시 들지 않았습니다.
그날 그는 미사를 드리던 중 뭔가를 경험했어요.
무엇인지는 끝내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 20년 넘게 써온 『신학대전』을 포함해 모든 저술을 멈췄어요.
걱정된 동료 레지날드가 물었습니다.
"왜 더 쓰지 않으시나요?"
토마스의 대답은 짧았어요.
"내가 쓴 것들이... 다 지푸라기처럼 느껴져."
수천 페이지의 논증을 쌓아올린 사람이, 중세 유럽의 신학을 통째로 재편한 사람이 한 말이에요.
3개월 뒤, 1274년 3월,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학대전』은 끝내 미완으로 남았어요.
그날 미사에서 그가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든, 20년간 쌓아올린 모든 글보다 더 크게 느껴졌던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 경험이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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