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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황제에게 집단 항의서를 들이민 사람들은 혁명가가 아니었어요.
과거 시험을 보러 베이징에 올라온 학자 1,200명이었습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완패했어요.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강대국이라 여겨지던 중국이 섬나라 일본에 대규모로 진 사건이에요.
패전의 대가로 중국은 조선과 타이완을 일본에 넘기고 거액의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습니다.
이 충격 속에서 캉유웨이가 움직였어요.
오늘날로 치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수험생들이 정부에 "불평등 조약에 서명하지 말고 제도를 바꿔라"는 집단 성명을 낸 셈입니다.
당시 중국에서 신하나 학자가 이렇게 집단으로 황제에게 요구하는 건 사실상 금기에 가까운 일이었거든요.
결국 조약은 그대로 체결됐어요.
하지만 이 공차상서는 중국 근대사에서 민간이 집단으로 정치에 개입한 첫 번째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캉유웨이의 개혁 실험은 103일 만에 강제 종료됐어요.
그리고 제자가 죽었습니다.
1898년, 광서제는 캉유웨이의 건의를 받아들여 관료 제도와 군사 제도, 교육 제도를 대대적으로 바꾸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실권을 쥔 서태후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서태후는 황실의 실질적 지배자로, 당시 광서제는 이름뿐인 황제였어요.
그는 광서제를 궁 안에 유폐시키고 모든 개혁을 한꺼번에 백지화했습니다.
캉유웨이는 황제의 밀서를 들고 일본으로 탈출했어요.
살아남은 것이죠.
문제는 제자 담사동이었어요.
도망칠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는 남기로 했습니다.
체포 직전, 그는 이런 말을 남겼어요.
"각국의 변법에는 피를 흘린 사람이 있었다.
중국에서 그 피를 흘리는 첫 번째 사람이 나여야 한다."
그리고 스물여섯 살에 처형됐습니다.
스승은 살아서 배에 올랐고, 제자는 죽어서 역사에 이름을 새겼어요.
이 장면의 무게가 이후 캉유웨이의 삶 전체를 따라다닙니다.

망명지에서 캉유웨이가 쓴 책은, 그가 지키려 한 체제의 정반대를 설계하고 있었어요.
대동서는 "국경을 없애고, 계급을 없애고, 가족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급진적 유토피아 설계도입니다.
단순한 개혁안이 아니에요.
국가 자체를 해체하자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캉유웨이는 이 책을 살아생전에 완전히 공개하지 않았어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책 내용과 그가 망명지에서 실제로 하는 일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에요.
그는 보황회를 창설해 광서제 복위 운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보황회는 말 그대로 황제를 지키기 위한 조직이에요.
세상의 모든 경계를 허물자는 책을 쓰면서, 동시에 황제 한 명을 복원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고 있었던 거예요.

개혁가 캉유웨이는 공화국이 세워지자 반동으로 불리기 시작했어요.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신해혁명은 2,000년간 이어온 황제 중심의 왕조 체제를 끝낸 혁명이에요.
캉유웨이가 16년간 꿈꿔온 황제 복원의 가능성이 이 순간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1917년, 군인 장훈이 청나라를 복원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캉유웨이는 이에 가담했습니다.
장훈의 복원 시도는 12일 만에 진압됐어요.
이 장면을 가장 멀리서 바라본 사람은 제자 양계초였어요.
한때 스승과 함께 일본으로 도망쳤던 양계초는 이미 공화주의자로 변해 있었습니다.
스승이 황제를 복원하려 할 때, 제자는 그 반대편에 서서 쿠데타에 반대했어요.
캉유웨이는 1927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가 남긴 책 안에는 국경도 황제도 없는 완전히 평등한 세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살다 간 현실에서, 그는 모든 경계를 허물자 외쳤던 사람이 황제 한 명을 지키다 생을 마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세상을 바꾸려 했던 사람이, 세상이 바뀌는 것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를 개혁가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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