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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독일 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세 정신이 한때 룸메이트였어요.
1790년대 초, 튀빙겐 신학교 기숙사 한 칸에 프리드리히 셸링, 게오르크 헤겔, 프리드리히 횔덜린이 함께 살았어요.
튀빙겐 신학교는 당시 독일 남서부의 엘리트 성직자 양성 기관으로, 입학 자체가 대단한 영예였어요.
셋 중 가장 어린 건 셸링이었어요.
고작 15살에 입학했거든요.
오늘날로 치면 중학교 졸업도 못 한 나이에 대학원 과정에 들어간 거예요.
세 사람은 밤마다 촛불 아래 칸트 철학을 읽고 프랑스 혁명 소식에 흥분했어요.
칸트는 당시 "인간은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는가"라는 물음을 완전히 새로 정립한 철학자예요.
그 기숙사 방에서, 독일 철학의 황금기가 싹텄어요.

셸링이 25살일 때, 괴테가 직접 그에게 편지를 보내 찬사를 보냈어요.
괴테는 당시 유럽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이자 지식인이었어요.
오늘날로 치면 노벨문학상 수상자와 스티브 잡스를 합쳐놓은 급의 영향력이에요.
셸링은 23살에 예나 대학교 교수직을 얻었어요.
예나 대학교는 당시 독일 철학의 심장부로, 칸트를 계승한 지식인들이 모여 논쟁을 벌이던 곳이에요.
그리고 25살에 『선험적 관념론 체계』를 냈어요.
이 책의 핵심 주장은 하나예요.
"인간의 정신과 자연은 뿌리가 같다."
오늘날로 치면 뇌과학과 물리학이 사실 같은 원리로 설명된다는 주장이에요.
헤겔과 셸링은 예나에서 철학 저널을 함께 편집할 만큼 가까운 동료였어요.
유럽 철학계가 들썩였고, 괴테까지 편지를 보낸 그해, 셸링은 25살이었어요.

1809년 이후, 셸링은 침묵했어요.
45년 동안이나요.
그해 셸링은 『인간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탐구』를 출판했어요.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를 철학적으로 정면 돌파한 책이에요.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하지만 그가 글을 안 쓴 건 아니에요.
책상 위엔 원고가 계속 쌓여갔어요.
그는 쓰고, 고치고, 또 고쳤어요.
하지만 내놓지 않았어요.
죽은 뒤 전집으로 묶인 원고는 수천 페이지에 달했어요.
45년의 침묵은 빈 시간이 아니었어요.
그해 그의 아내 카롤리네가 세상을 떴어요.
카롤리네는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었어요.
독일 낭만주의 지식인 모임의 중심 인물이자, 셸링의 사상적 대화 상대였어요.
그녀가 사라진 뒤, 셸링의 출판도 멈췄어요.
동료들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 천재가 왜 말을 잃었는지, 아무도 몰랐어요.

1841년,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셸링을 베를린으로 불렀어요.
당시 독일 철학계는 헤겔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헤겔의 사상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어요.
왕은 셸링이 그 흐름을 끊어줄 거라 기대했어요.
강의실은 꽉 찼어요.
청중 중엔 훗날 실존주의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쇠렌 키르케고르, 공산주의 혁명가 프리드리히 엥겔스,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이 앉아 있었어요.
오늘날로 치면 철학자, 혁명가, 반체제 지식인이 동시에 한 강의실에 앉은 거예요.
하지만 결과는 실망이었어요.
키르케고르는 강의가 거듭될수록 점점 실망해 갔고, 결국 비판적인 기록을 남겼어요.
엥겔스도 셸링의 강의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글을 따로 썼어요.
셸링은 그 이후로도 13년을 더 살았어요.
하지만 그의 철학적 목소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요.
원고들은 그가 죽은 뒤에야 서랍 밖으로 나왔어요.
그 안에는 45년의 생각이 가득했어요.
어쩌면 셸링은 25살에 이미 정점을 찍었다는 걸,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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