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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비즈냐나(vijñāna)는 "신만 진짜이고 세상은 헛것"이라는 앎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바로 그 신이 이 세상 전체가 되어 있음을 온몸으로 아는 무르익은 앎이에요. 그래서 눈앞의 사람과 풀 한 포기까지 전부 신의 모습으로 보이게 돼요.
라마크리슈나(1836년~1886년)는 인도 벵골의 신비 사상가예요.
힌두교뿐 아니라 이슬람과 기독교까지 직접 수행하며 여러 종교가 결국 같은 자리에 이른다는 걸 체험으로 보여준 사람이지요.
그 체험이 가장 무르익은 자리를 그는 비즈냐나(vijñāna)라고 불렀어요.
비즈냐나는 '더 깊고 완전한 앎'이라는 뜻이에요.
설탕이 달다는 걸 책으로 읽어서 아는 것과, 직접 혀에 올려놓고 아는 것은 전혀 다르지요?
비즈냐나는 뒤쪽이에요.
신을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맛본 앎이지요.
그런데 그 맛을 제대로 본 사람은 뜻밖의 걸 깨달아요.
신과 세상이 둘로 갈라진 게 아니라는 것을요.
저 멀리 있는 신을 겨우 붙잡는 게 아니라, 눈앞의 세상 전체가 이미 그 신이 되어 있더라는 거예요.
이 뒤집힘이 비즈냐나의 핵심이에요.
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두 단어를 나란히 놓는 게 좋아요.
하나는 갸나(jñāna), 하나는 비즈냐나(vijñāna)예요.
갸나는 "신만이 참되고, 이 세상은 환영(마야)일 뿐"이라고 딱 잘라 보는 앎이에요.
바다에서 파도를 보며 "이건 가짜야, 진짜는 물이야"라고 말하는 단계지요.
여기서 세상은 벗어나야 할 껍데기예요.
비즈냐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요.
물만 진짜라는 걸 안 사람이 다시 돌아와 "파도도 결국 물이잖아. 그러니 파도도 진짜야"라고 세상을 끌어안는 앎이에요.
| 견주는 점 | 갸나(jñāna) | 비즈냐나(vijñāna) |
|---|---|---|
| 세상을 보는 눈 | 세상은 헛것, 신만 참됨 | 세상도 신이 그렇게 나타난 모습 |
| 비유 | 파도는 가짜, 물만 진짜 | 파도도 결국 물이다 |
| 태도 | 세상에서 등을 돌림 | 세상으로 돌아와 껴안음 |
라마크리슈나는 형체 없는 절대자를 깊이 체험한 뒤(자료에 따르면 니르비칼파 사마디를 이룬 뒤), 다시 돌아와 이 세상 하나하나가 바로 그 신이 펼쳐 놓은 모습임을 보았어요.
그 돌아온 자리가 비즈냐나예요.
그래서 그를 세상을 부정한 사람으로만 읽으면 절반만 본 셈이에요.
그는 세상을 부정한 뒤, 다시 세상을 신으로 긍정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세상 전체가 신이라면, 눈앞의 사람도 신이에요.
이 앎은 머릿속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사는 방식을 바꿔요.
라마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yatra jiv tatra Shiv — 살아있는 존재가 있는 곳에, 그곳에 시바(신)가 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도 가르쳤어요.
Jive daya noy, Shiv gyane jiv seba — 생명체를 불쌍히 여기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를 시바 그 자체로서 섬겨라.
'불쌍히 여긴다'는 말에는 나는 위에 있고 상대는 아래에 있다는 뜻이 은근히 숨어 있어요.
하지만 상대가 곧 신이라면, 내려다보며 동정할 게 아니라 신을 모시듯 섬겨야 하지요.
이 한 문장이 훗날 그의 수제자 비베카난다가 평생 가난한 이들을 돕는 봉사로 이어진 씨앗이 되었다고 전해져요.
비즈냐나는 골방에 홀로 앉은 명상으로 끝나는 앎이 아니에요.
다시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 만나는 얼굴마다 신으로 대하게 만드는 앎인 셈이지요.
비즈냐나는 라마크리슈나 사상의 잘 익은 열매예요.
신만 참되다는 앎(갸나)에서 멈추지 않고, 그 신이 이 세상 전체가 되어 있음을 온몸으로 맛본 자리가 비즈냐나였어요.
그래서 그에게 세상은 등질 대상이 아니라 신이 나타난 마당이었고, 눈앞의 사람은 동정할 상대가 아니라 섬길 신이었지요.
높은 곳에 올라 하늘만 보고 오는 게 아니라, 그 하늘이 산과 마을과 사람으로 내려와 있음을 보고 다시 걸어 내려오는 앎.
그 되돌아오는 걸음이 비즈냐나라고 기억하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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