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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효종이 왕위를 이었으니 맏아들로 대우해 새어머니가 3년 상복을 입는 게 옳다는 것이 윤휴 예론의 핵심이에요. 어머니라도 임금 앞에서는 신하이기에, 임금이 된 아들의 죽음에는 가장 무거운 상복으로 예를 갖춰야 한다고 봤죠.
윤휴(1617년부터 1680년까지)는 조선 후기 학자로, 주자의 해석에 도전했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린 사람이에요.
그의 예론(禮論)은 '예(禮), 곧 사람이 지켜야 할 예법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생각인데, 특히 상복을 몇 년 입느냐를 두고 나라가 둘로 갈린 '예송(禮訟)'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요.
1659년, 효종 임금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궁궐에서 엉뚱해 보이는 다툼이 벌어졌죠.
"돌아가신 임금의 새어머니가 상복을 1년 입어야 하나, 3년 입어야 하나?"
지금 보면 사소해 보이지만, 이 한 가지 물음이 조선 후기 정치를 뒤흔들었어요.
윤휴는 여기서 3년을 주장한 쪽이었고, 그 이유가 아주 독특했어요.
상복은 그냥 옷이 아니라 '누구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눈에 보이게 정해 둔 규칙이었어요.
학교에서 반장을 대하는 태도와 짝꿍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듯, 조선에서는 죽은 사람과 나의 관계에 따라 상복의 무게와 기간이 정해져 있었죠.
그래서 상복 기간을 정하는 일은 곧 '효종을 어떤 아들로 볼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었어요.
문제의 새어머니는 자의대비였어요.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죠.
그래서 서인(송시열 쪽)은 "둘째 아들이니 어머니는 1년만 입으면 된다"고 했어요.
이것을 기년설이라고 불러요.
반대로 윤휴는 "효종은 왕위를 이었으니 맏아들과 똑같이 대접해야 한다. 그러니 3년이다"라고 맞섰어요.
윤휴의 논리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어 있어요.
바로 신모설(臣母說)이에요.
'어머니이지만 신하(臣)이기도 하다'는 뜻이죠.
풀어 볼게요.
자의대비는 분명 효종의 어머니예요.
하지만 효종이 임금이 된 순간, 온 나라 사람이 그의 신하가 되었어요.
어머니라고 예외가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 임금인 아들이 죽으면, 어머니도 '신하로서' 임금에게 바치는 가장 무거운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게 윤휴의 생각이었어요.
그 가장 무거운 상복을 참최삼년(斬衰三年)이라고 불렀는데, 원래 자식이 아버지에게, 신하가 임금에게 입는 3년짜리 상복이에요.
즉 윤휴는 '왕이라는 자리'를 혈통보다 앞세운 셈이에요.
태어난 순서(둘째)보다, 임금이 되었다는 사실이 더 무겁다고 본 거죠.
재미있게도, 윤휴와 같은 편(남인)이던 허목도 3년복을 주장했어요.
하지만 그 이유는 서로 달랐답니다.
같은 결론이라고 논리까지 같다고 뭉뚱그리면 오해예요.
| 입장 | 상복 기간 | 핵심 논거 |
|---|---|---|
| 서인(송시열) | 1년(기년) | 효종은 둘째 아들이니 차자의 예로 대한다 |
| 허목(남인) | 3년(자최삼년) | 왕위를 이은 혈통 계승을 근거로 삼는다 |
| 윤휴(남인) | 3년(참최삼년) | 임금 앞에선 어머니도 신하다(신모설) |
허목이 '핏줄의 계승'에 무게를 뒀다면, 윤휴는 '임금이라는 지위' 자체에 무게를 뒀어요.
그래서 상복도 허목은 자최삼년, 윤휴는 그보다 더 무거운 참최삼년으로 갈렸죠.
1674년, 이번엔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났어요.
시어머니 자의대비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다시 "며느리 상에 몇 년을 입나"가 문제가 됐죠.
그런데 이번에 윤휴는 1년복을 주장했어요.
앞에선 3년이라더니 왜 말이 바뀌었을까요?
사실 바뀐 게 아니에요.
윤휴는 처음부터 '효종을 맏아들로 본다'는 원칙을 지켰거든요.
효종이 맏아들이면 그 아내인 인선왕후는 맏며느리예요.
그리고 맏며느리를 위한 상복은 원래 1년이었죠.
원칙은 그대로인데 상대가 아들에서 며느리로 바뀌니 답이 달라졌을 뿐이에요.
이번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윤휴는 대사헌과 이조판서 같은 요직에 오르기도 했어요.
윤휴가 미움받은 표면적 이유는 주자와 다른 해석을 했다는 거예요.
하지만 상복 3년을 주장한 것이 그 자체로 죽을 죄일 리 없죠.
진짜 불씨는 정치였어요.
예송은 서인과 남인이 나라의 주도권을 두고 부딪친 자리였고, 상복 논쟁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무기로 쓰였어요.
학문에서 시작된 이견이 권력 다툼으로 번지면서 윤휴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 곧 '유학의 도리를 어지럽힌 도적'이라는 무서운 낙인이 찍힌 거죠.
결국 그는 1680년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어요.
윤휴 예론은 한마디로 '자리가 혈통을 이긴다'는 생각이에요.
효종이 둘째로 태어났어도 임금이 된 이상 맏아들로 대접해야 하고, 어머니조차 임금 앞에서는 신하이니 가장 무거운 상복으로 예를 갖춰야 한다고 봤죠.
같은 3년을 주장한 허목이 혈통을 근거로 삼은 것과 달리, 윤휴는 신모설로 임금의 자리를 앞세웠다는 점만 기억해도 충분해요.
상복 몇 년이라는 작은 물음 뒤에 '나라의 질서를 무엇으로 세울까'라는 물음이 놓여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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