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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현량과는 필기 점수만이 아니라, 지방 관리가 "이 사람 됨됨이가 훌륭하다"고 추천한 인재를 임금이 직접 살펴 뽑은 인품 중심의 특별 관리 선발 시험이에요. 조선 중종 때 조광조가 앞장서 딱 한 번 시행했어요.
요즘 회사에 들어갈 때를 떠올려 볼게요.
시험 점수만 높으면 무조건 뽑는 게 아니라, "저 친구는 성실하고 정직하다"는 평판과 추천서를 함께 보는 경우가 많죠.
대학 입시로 치면 오직 시험 점수로 줄 세우는 정시가 아니라, 선생님이 "이 학생 참 반듯합니다" 하고 추천해 주는 수시 전형에 가까워요.
현량과(賢良科)가 바로 이런 시험이었어요.
글자를 뜯어보면 뜻이 더 잘 보여요.
賢(현)은 '어질다', 良(량)은 '착하고 좋다', 科(과)는 '시험'이에요.
그러니까 '어질고 반듯한 사람을 뽑는 시험'이라는 이름이죠.
조광조(趙光祖, 1482년부터 1520년까지 산 인물)는 조선 중종 때 사림파를 이끈 성리학자였는데, 그가 앞장서서 1519년 4월에 이 현량과를 처음 실시했고, 김식(金湜)을 비롯해 스물여덟 명을 뽑았어요.
조선에는 이미 '과거(科擧)'라는 오래된 관리 선발 시험이 있었어요.
그런데 과거는 주로 글솜씨와 암기를 봤어요.
정해진 형식에 맞춰 멋진 문장을 짓는 능력이죠.
문제는, 글을 아무리 잘 써도 사람 됨됨이까지 반듯하다는 보장은 없다는 거예요.
시험 잘 보는 것과 좋은 관리가 되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요.
조광조는 여기에 불만이 있었어요.
나라를 맡길 사람이라면 실력만이 아니라 도덕적 인품이 먼저여야 한다고 봤거든요.
그래서 글재주 대신 '평소에 얼마나 바르게 살았는가'를 보고 인재를 건져 올리는 새 통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마을에서 평판 좋고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곧바로 발탁하자는 것, 이게 현량과가 나온 이유예요.
현량과의 핵심은 '추천'이에요.
순서를 따라가 보면 이래요.
먼저 각 고을의 지방 관리가 자기 지역에서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사람을 골라 나라에 추천해요.
이렇게 이름이 올라온 사람들을 임금이 한자리에 불러 모아, 왕이 직접 시험을 치르게 해요.
추천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마지막에 임금이 친히 살펴본다는 점이 중요해요.
즉 '아래에서 추천 → 위에서 확인'이라는 두 단계를 거치는 셈이에요.
평판이라는 그물로 널찍하게 사람을 건져 올린 뒤, 임금이 한 번 더 눈으로 확인하는 구조죠.
이 첫 시험에서 김식 등 스물여덟 명이 뽑혔고, 이들 상당수는 조광조와 뜻을 같이하는 젊은 사림파였어요.
둘을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한눈에 들어와요.
| 구분 | 기존 과거 | 현량과 |
|---|---|---|
| 뽑는 방식 | 응시자가 직접 시험 봄 | 지방관이 먼저 추천 |
| 주로 보는 것 | 글솜씨·암기 실력 | 도덕적 인품·행실 |
| 마지막 관문 | 정해진 시험 절차 | 임금이 친히 시험 |
| 시행 규모 | 정기적·오래 이어짐 | 1519년 단 한 번 |
한마디로 기존 과거가 '글로 겨루는 시험'이라면, 현량과는 '됨됨이로 추천받는 시험'이었어요.
조광조는 인품 좋은 사람을 관직에 앉혀야 정치가 맑아진다고 믿었고, 현량과는 그 믿음을 제도로 만든 결과물이었어요.
안타깝게도 현량과의 수명은 아주 짧았어요.
1519년 4월에 첫 시험을 치른 그해, 조광조와 사림파는 중종반정 공신 명단에서 부당하게 이름을 올린 자들의 공을 지우자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밀어붙였어요.
오래 권력을 쥐고 있던 훈구파 대신들에겐 큰 위협이었죠.
그 한 달 뒤인 음력 11월, 홍경주·남곤·심정 같은 훈구파가 밤에 몰래 궁으로 들어가 "조광조 무리가 붕당을 지어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임금에게 고했고, 조광조는 전격 체포됐어요.
이 사건이 기묘사화(己卯士禍)예요.
조광조는 결국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서른일곱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를 따르던 현량과 급제자들도 함께 몰락하면서, 현량과 역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어요.
현량과는 조광조가 1519년에 딱 한 번 실시한, 인품과 추천을 앞세운 관리 선발 시험이에요.
글솜씨로 줄 세우던 기존 과거와 달리, 지방관이 됨됨이 좋은 사람을 추천하면 임금이 직접 살펴 스물여덟 명을 뽑았죠.
'실력보다 사람 됨됨이를 먼저 보자'는 발상 자체는 오늘의 채용에도 남아 있지만, 현량과는 기묘사화와 함께 짧게 끝났어요.
이 시험 하나만 기억한다면, '점수가 아니라 인품으로 사람을 고르려 했던 조선의 실험'이라고 떠올리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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