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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도학정치는 성리학(도학)의 도덕 이상을 정치의 뿌리로 삼자는 생각이에요. 힘이나 법으로 억누르기 전에 임금부터 먼저 성인처럼 반듯한 사람이 되고, 그 도덕의 힘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조광조의 정치 철학이지요.
반 아이들이 규칙을 잘 지키게 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고 해볼게요.
하나는 "떠들면 벌점"처럼 무섭게 겁을 주는 방법이에요.
다른 하나는 선생님부터 먼저 반듯하게 행동해서 아이들이 저절로 따라 하게 만드는 방법이고요.
조광조가 내세운 도학정치(道學政治)는 두 번째 쪽이에요.
무섭게 누르는 대신, 다스리는 사람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 본보기가 되자는 거지요.
'도학(道學)'은 도(道), 곧 사람이 마땅히 걸어야 할 바른길을 배우는 학문이라는 뜻이에요.
조선에서는 성리학을 이렇게 불렀지요.
여기에 '정치'를 붙인 도학정치는, 이 도덕 공부를 책 속에만 두지 말고 나라 다스리는 실제 정치에 그대로 옮기자는 생각이에요.
좋은 정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는 공부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본 거예요.
| 다스리는 방법 | 어떻게 | 도학정치의 선택 |
|---|---|---|
| 힘과 법으로 | 벌을 무섭게 해 억누름 | 참된 뿌리가 아니라고 봄 |
| 도덕으로 | 다스리는 이가 먼저 모범이 됨 | 정치의 참된 뿌리 |
조광조(1482년~1519년)는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이자 사림파의 영수예요.
김종직에서 김굉필로 이어진 성리학 학맥을 물려받았지요.
그의 생각은 여기서 자세히 다 풀지 않아도, 한 장면만 봐도 잘 드러나요.
1515년 알성시라는 과거 시험에서 조광조는 정치의 핵심으로 '명도(明道)'와 '근독(謹獨)'을 답으로 적었어요.
명도는 도를 밝힌다는 뜻이고, 근독은 혼자 있을 때도 몸가짐을 삼간다는 뜻이에요.
아무도 안 볼 때조차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다스려야 나라가 제대로 선다는 이야기였죠.
마치 아무도 안 보는 텅 빈 교실에서도 쓰레기를 줍는 아이 같은 태도예요.
이 답안이 중종의 마음에 들어 조광조가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도학정치는 이렇게 '먼저 나부터 반듯하게'라는 마음에서 출발해요.
조광조는 말로만 그치지 않았어요.
도덕을 나라의 기준으로 세우려고 실제 제도를 손댔지요.
예를 들어 하늘과 별, 산천에 제사 지내던 소격서라는 도교식 관청을 없애자고 밀어붙여 폐지시켰어요(자료마다 1516년 또는 1518년으로 시점이 갈려요).
성리학의 도덕만이 나라의 기준이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에요.
사람을 보는 눈도 남달랐어요.
백정, 즉 당시 가장 낮은 신분이던 도살업자 출신 학자와도 사귀며 그 학식을 존중해 벼슬을 주려 했다는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전해요.
상대가 사양하고 자취를 감췄다지만, 도덕과 학문 앞에서는 신분이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가 그대로 드러나지요.
도덕을 기준으로 인재를 뽑는 현량과, 마을을 도덕 규약으로 다스리는 향약도 같은 뿌리에서 나왔어요.
다만 이들은 각각 따로 이야기할 만큼 큰 주제라 여기서는 이름만 짚고 넘어갈게요.
조광조와 사림파의 힘은 사헌부·사간원·홍문관, 이 세 곳을 합친 '삼사(三司)'라는 언론 기관에 몰려 있었어요.
잘못을 따지고 비판하는 게 삼사의 일이라, 도덕으로 권력을 견제하기에 딱 맞았죠.
다만 이들에겐 군대도 돈줄도 없어서, 그 힘은 오직 임금의 신임 하나에 매달려 있었어요.
너무 빠르고 너무 곧았던 게 문제였어요.
1519년 조광조는 중종반정 공신 명단에서 부당하게 상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지우자는 '위훈삭제'를 밀어붙여, 공신 상당수의 자격을 빼앗았어요(자료에 따라 105명 중 76명, 또는 110명 중 3분의 2).
도덕상 옳은 일이었지만, 손해를 본 훈구파 대신들에겐 깊은 원한이 됐죠.
한 달 뒤 홍경주·남곤·심정 같은 대신들이 밤에 몰래 궁으로 들어가, 조광조가 무리를 지어 왕이 되려 한다고 고발했어요.
이때 유명한 게 '주초위왕(走肖爲王)' 이야기예요.
走(주)와 肖(초)를 합치면 조광조의 성 趙(조)가 되는데, 나뭇잎에 꿀물로 이 글자를 써 벌레가 갉아먹게 해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모함을 만들었다는 거죠.
이 사건이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예요.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고 서른일곱 나이에 죽었어요.
후대의 큰 학자들도 도학정치의 조급함을 짚었어요.
이황은 조광조의 자질은 참으로 아름다웠으나 학문이 충실하지 못한 채 정치에 나서 지나침을 면치 못했다고 봤고, 이이도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했다고 아쉬워했어요.
도덕이라는 이상을 현실보다 너무 앞세우다 세상의 벽에 부딪힌 셈이지요.
물론 훈구파의 모함과 중종의 변심 탓이 컸다는 해석도 함께 전해요.
도학정치는 성리학이라는 도덕 공부를 정치의 뿌리로 삼아, 다스리는 사람부터 먼저 성인이 되자는 조광조의 꿈이었어요.
소격서를 없애고 신분을 넘어 사람을 사귄 일처럼, 도덕이 힘보다 먼저라는 믿음을 실제로 밀어붙였지요.
하지만 군대도 돈도 없이 임금의 신임에만 기댄 채 너무 빨리 나아가다, 기묘사화로 꺾이고 말았어요.
그럼에도 조광조는 훗날 복권되어 문묘에 모셔진 해동 18현의 한 사람이 되었고, 도학정치는 "정치가 도덕 위에 서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조선에 오래 남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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