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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존덕성(尊德性)은 밖에서 지식을 쌓기 전에,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착한 마음(본심)을 먼저 존중하고 길러 공부의 뿌리로 삼자는 육구연의 방법이에요. 배움은 그 뿌리에서 자라야 흔들리지 않는다고 본 거죠.
한자 세 글자를 하나씩 뜯어볼게요.
존(尊)은 '높이다, 받들다'예요.
덕성(德性)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도덕적 본바탕을 말해요.
그러니까 존덕성은 '내 안에 이미 있는 착한 본성을 높이 받들어 기른다'는 뜻이에요.
비유로 볼까요.
마당에 씨앗이 이미 심겨 있다고 해봐요.
존덕성은 그 씨앗에 물을 주고 햇빛을 쬐어 잘 키우는 일이에요.
밖에서 예쁜 화분을 잔뜩 사와서 마당에 늘어놓는 게 아니라, 원래 있던 씨앗을 믿고 키우는 거죠.
육구연이 보기에 사람 마음속 씨앗은 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이에요.
남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인 측은(惻隱),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인 수오(羞惡), 사양할 줄 아는 마음인 사양(辭讓),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인 시비(是非)죠.
이 네 가지가 각각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싹이라고 봤어요.
존덕성은 결국 이 싹을 존중하고 길러내는 공부예요.
육구연(陸九淵, 1139년 출생)은 자가 자정(子靜), 호가 상산(象山)이에요.
강서 상산서원에서 가르쳐 '상산선생'으로 불렸고, 마음을 중심에 둔 심학(心學)을 처음 세운 사람이죠.
몰년은 자료마다 갈려요.
영문 위키백과는 1192년, 중문 위키백과는 1193년으로 적어요.
어느 한쪽으로 못 박기 어렵다는 점만 짚어둘게요.
그가 존덕성을 앞세운 이유는 공부를 어떤 순서로 해야 하는지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에요.
1175년 여조겸의 초청으로 육구연과 주희가 아호(鵝湖)에서 만난 자리가 유명해요.
여기서 육구연은 '堯舜之前有何書可讀(요순지전유하서가독)', 즉 '요임금과 순임금 이전에는 무슨 책이 있어 읽었겠는가'라고 되물었어요.
성인들도 읽을 책이 없던 시절에 훌륭했다면, 사람됨의 뿌리는 책 밖 마음에 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그는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明心見性)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봤어요.
반대로 그는 주희가 사물을 하나하나 파고드는 공부(격물치지)를 두고 '支離破碎(지리파쇄)', 곧 '갈라지고 부서져 자잘하다'고 비판했어요.
지식만 잔뜩 모으다 정작 마음의 뿌리를 놓친다고 본 거예요.
육구연이 조정에 올린 다섯 가지 건의(五論) 중에도 '존덕낙도(尊德樂道)의 성의를 다하라'는 말이 있는데, 덕을 높이는 일을 늘 앞자리에 두려던 그의 태도가 잘 드러나요.
존덕성을 이해하려면 짝이 되는 말인 도문학(道問學)을 같이 보면 쉬워요.
두 말은 원래 유교 경전 《중용(中庸)》에 나란히 나오는 두 가지 공부 방법이에요.
도문학은 '묻고 배워 지식을 넓혀가는 길'이에요.
주희는 이쪽에 무게를 뒀고, 육구연은 존덕성 쪽에 무게를 뒀어요.
정리하면 이래요.
| 구분 | 육구연의 존덕성 | 주희의 도문학 |
|---|---|---|
| 공부의 출발점 | 내 안의 타고난 본심 | 밖의 사물과 책 |
| 방법 | 마음의 뿌리를 먼저 세움 | 하나하나 궁리해 넓힘 |
| 비유 | 심긴 씨앗을 키우기 | 화분을 모아 늘리기 |
| 상대 평가 | 도문학은 자잘하다(지리) | 존덕성은 비었다(공소) |
둘은 아호에서 만나 서로를 깎아내리며 헤어졌어요.
주희는 육구연의 학설이 간략하고 텅 비었다(空疎)고 여겼고, 육구연은 주희의 학설이 갈라지고 자잘하다고 여겼죠.
흔히 이 만남을 극적인 승부처럼 그리지만, 자료를 보면 딱 부러진 승패는 없었어요.
서로 상대를 못마땅해하며 갈라선 자리였을 뿐이에요.
존덕성을 '공부 안 하고 마음만 믿으면 된다'는 말로 오해하기 쉬워요.
하지만 육구연이 책과 배움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에요.
그가 말한 건 순서예요.
뿌리인 본심을 먼저 세우고, 그 위에서 배움이 자라야 지식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죠.
뿌리 없이 잎만 무성하면 바람에 넘어진다고 본 거예요.
또 하나, 육구연의 심학은 그가 살아 있을 때나 죽은 직후에는 중국에서 크게 퍼지지 못하고 거의 잊혔어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육왕심학'의 이름값은 훗날 명나라의 왕양명이 그의 글을 다시 펴내고 풀이하면서 되살아난 덕분이 커요.
그러니 육구연과 왕양명을 곧바로 같은 사람처럼 묶어 보면 안 돼요.
오늘의 우리에게 존덕성은 이렇게 다가와요.
시험 점수와 정보를 모으기 전에, 내가 옳다고 느끼는 마음, 남을 딱하게 여기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이미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먼저 믿고 돌보라는 이야기죠.
지식은 그다음에 얹으면 돼요.
존덕성은 '타고난 도덕 본성을 높이 받들어 기른다'는 육구연의 공부법이에요.
그는 사람 마음속에 이미 착한 씨앗(맹자의 사단)이 있다고 보고, 밖에서 지식을 쌓기 전에 그 뿌리부터 세우라고 했어요.
짝이 되는 주희의 도문학이 '묻고 배워 넓히기'라면, 존덕성은 '내 안의 본심 키우기'예요.
두 사람은 아호에서 서로를 비판하며 갈라섰지만 명확한 승패는 없었어요.
육구연의 이름은 뒤에 왕양명을 통해 되살아났다는 점을 기억해두면, 존덕성이 왜 심학의 출발점이었는지 쉽게 이해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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