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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이븐 루시드는 세계 '자체'는 시작 없이 늘 있었고, 시간 속에서 새로 생긴 것은 세계의 '형상', 곧 지금의 모습뿐이라고 봤어요. 그래서 '세계는 영원하다'는 철학과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신앙이 실은 부딪히지 않는다고 했지요.
밤에 켜 둔 선풍기를 떠올려 볼까요.
날개가 돌아가는 '모습'은 방금 스위치를 눌러 시작됐지만, 선풍기라는 물건 자체는 아까부터 거기 있었어요.
이븐 루시드가 말한 '세계의 영원성'도 비슷해요.
'세계가 영원하다'는 말은 이 우주가 시작하는 첫 순간 없이 늘 있어 왔다는 뜻이에요.
어제, 그제, 그 전으로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여기서부터 우주가 생겼다' 하는 딱 그 출발점이 없다는 거죠.
이 생각은 이븐 루시드가 처음 꺼낸 게 아니라, 그가 무척 존경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온 오래된 물음이었어요.
이슬람 철학자 알파라비와 이븐 시나도 세계는 늘 있어 왔다고 봤고요.
간단히 말해, 이 논쟁의 핵심은 하나예요.
'우주에 진짜 첫날이 있었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계속 있었는가.'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이건 그냥 과학 퀴즈가 아니었어요.
많은 신앙에서는 '신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가르치거든요.
만들었다는 건 그 전엔 없었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철학자들이 '세계는 시작 없이 영원하다'고 하면, 신이 세상을 만든 게 아니라는 말처럼 들려서 크게 부딪혔어요.
그래서 신학자 알가잘리가 《철학자들의 모순》(تهافت الفلاسفة, 타하푸트 알팔라시파)이라는 책에서 철학자들을 세게 비판해요.
세계가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아예 '쿠프르(kufr)', 곧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라고까지 몰아붙였지요.
이건 아주 무거운 말이었어요.
이븐 루시드는 《모순의 모순》(تهافت التهافت, 타하푸트 앗타하푸트)이라는 책으로 되받아쳐요.
제목이 '알가잘리, 당신의 반박이야말로 앞뒤가 안 맞는다'는 뜻이에요.
그의 답은 '나눠서 보자'였어요.
세계를 두 가지로 갈라요.
| 구분 | 뜻 | 창조됐나 |
|---|---|---|
| 존재 자체 | 뭔가가 '있다'는 사실 | 시작 없이 영원함 |
| 형상 | 지금 이 세계의 모습·질서 | 시간 속에서 만들어짐 |
그러니까 우주가 '있다'는 그 사실은 늘 있어 왔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하늘과 별과 산 같은 '모습'은 신이 시간 속에서 빚어낸 것이라는 거예요.
앞의 선풍기로 치면, 물건은 계속 있었고 돌아가는 모습만 새로 시작된 셈이죠.
이렇게 읽으면 코란을 꼼꼼히 살펴도 '영원함'과 '창조'가 함께 설 수 있다고 봤어요.
그래서 그는 알가잘리에게 이렇게 말한 셈이에요.
두 입장의 차이가 누군가를 '믿음을 버린 자'라고 낙인찍을 만큼 크지 않다고요.
이 논쟁에는 재미있는 예가 하나 나와요.
불에 닿은 목화솜이 타는 장면이에요.
알가잘리는 목화가 타는 것도, 그 밖의 모든 일도 신이 그때그때 직접 일으키신다고 봤어요.
불은 그냥 옆에 있을 뿐이라는 거죠.
반대로 이븐 루시드는 이렇게 말해요.
목화를 태우는 건 신이 아니라 '불'이라고요.
신은 불이 무언가를 태우도록 자연의 규칙을 만들어 두셨고, 세상 만물은 그 규칙을 따라 움직인다는 거예요.
이 생각이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세상에 믿을 만한 '규칙'이 있어야, 우리가 원인과 결과를 살펴 자연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뒷날 유럽에서 이성으로 자연을 탐구하는 흐름에 이 태도가 힘을 보탰다고 전해져요.
이븐 루시드의 '세계의 영원성'은 딱 한 문장으로 기억하면 돼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은 영원하지만, 그 모습은 시간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는 이 나눔으로 '영원한 세계'라는 철학과 '창조하는 신'이라는 신앙이 서로를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보여 주려 했어요.
그리고 목화 이야기처럼, 세상은 신이 세운 자연의 규칙대로 움직인다고 봤지요.
어느 쪽이 옳은지 여기서 결론 낼 필요는 없어요.
다만 800년 전 코르도바의 한 철학자가 '시작이 있었나 없었나'라는 큰 물음을 이렇게 차분히 갈라 본 방식만은 오래 기억할 만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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