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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가잘리는 불이 목화를 태우는 게 자연법칙 때문이 아니라 매 순간 신이 그렇게 되기를 원해서라고 봤어요.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연결 고리가 없고, 우리가 둘이 늘 붙어 일어나는 걸 보다 보니 '원인이 결과를 만든다'고 믿게 됐을 뿐이라는 거예요.
솜뭉치에 불을 갖다 대면 활활 타죠.
우리는 당연히 "불이 솜을 태웠다"고 말해요.
그런데 만약 누가 "불이 솜을 태운 게 아니에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900여 년 전 한 학자가 진지하게 그렇게 말했어요.
그 사람이 바로 알 가잘리예요.
1058년쯤 페르시아 투스에서 태어나 1111년에 세상을 떠난 이슬람 학자로, 한때 바그다드 니자미야 학원의 최고 교수였어요.
그는 《철학자들의 모순》이라는 책에서 아주 대담한 주장을 펴요.
불과 태움 사이에, 원인과 결과 사이에 우리가 믿는 것 같은 '필연적인 연결'은 사실 없다는 거예요.
이게 가잘리의 인과율 비판이에요.
가잘리의 논리를 따라가 볼게요.
우리가 실제로 눈으로 보는 건 무엇일까요?
'불이 닿는 장면'과 '솜이 타는 장면', 이 두 가지예요.
그런데 이 둘을 이어 주는 '태움이라는 힘' 자체를 우리가 본 적이 있나요?
없어요.
우리는 불 다음에 곧바로 탐이 온다는 것만 볼 뿐, 불이 솜을 '억지로 태우게 만드는' 그 연결 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비유하자면 이래요.
매일 아침 수탉이 울고 나면 해가 떠요.
그렇다고 수탉이 해를 뜨게 만드는 건 아니죠.
그냥 두 일이 항상 나란히 일어날 뿐이에요.
가잘리는 불과 태움도 이와 똑같다고 봐요.
늘 붙어 다니니까 우리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만든다'고 착각한다는 거예요.
습관이 만든 믿음이지, 증명된 필연이 아니라는 거죠.
그럼 솜은 대체 왜 탈까요?
가잘리의 답은 이래요.
불이 닿는 '그때마다' 신이 직접 솜이 타기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불에 태우는 힘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신이 매 순간 그 결과를 새로 일으킨다는 뜻이에요.
이런 생각을 어려운 말로 '기회원인론(occasionalism)'이라고 불러요.
조금 더 쉽게 볼까요.
무대 위에서 인형이 걷고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뒤에서 인형사가 매 동작마다 실을 당기고 있죠.
가잘리가 본 세상이 이래요.
불이 원인처럼 보여도, 실제로 태움을 일으키는 건 매번 새로 손을 쓰는 신이에요.
그래서 신이 원하기만 하면 불에 닿아도 솜이 안 타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봐요.
불 속에서도 멀쩡했다는 기적 이야기가 모순이 아니게 되는 셈이죠.
이 주장에 다음 세기의 철학자 이븐 루시드(라틴어로 아베로에스)가 정면으로 반박해요.
그는 《모순의 모순》이라는 책을 써서 조목조목 따졌어요.
신이 세상을 만든 건 맞지만, 세상에는 인간이 알아볼 수 있는 일정한 질서와 패턴이 있다는 입장이에요.
그러니 "불이 솜을 태웠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쓸모 있다는 거죠.
두 사람의 생각을 견줘 볼게요.
| 물음 | 가잘리 | 아베로에스 |
|---|---|---|
| 불이 솜을 태우나 | 아니다, 신이 태운다 | 신이 만든 질서 안에서 불이 태운다 |
| 원인과 결과 연결 | 필연이 아니다 | 알아볼 수 있는 규칙이 있다 |
| 더 나은 태도 | 매 순간 신의 뜻을 본다 | 자연의 패턴을 읽는다 |
흥미로운 건, 이 논쟁에서 이슬람 사상의 방향은 이미 가잘리 쪽으로 크게 기운 뒤였다는 점이에요.
반박은 길고 정교했지만 흐름을 되돌리진 못했어요.
가잘리의 물음은 '옛날 종교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아요.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연결을 정말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습관으로 믿는가?"
이 질문은 훗날 서양 철학에도 닿아요.
자료에 따르면 가잘리는 단테,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인과를 '습관에서 나온 믿음'으로 분석한 데이비드 흄에게까지 영향을 준 것으로 이야기돼요.
우리도 일상에서 이런 착각을 자주 해요.
시험 전에 빨간 펜을 썼더니 점수가 잘 나왔다고 부적처럼 챙기거나, 두 사건이 나란히 일어난 것만 보고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이라 단정하죠.
가잘리는 900년 전에 이미 "함께 일어남과 원인임은 다르다"고 콕 집어 준 셈이에요.
가잘리의 인과율 비판은 세 걸음으로 기억하면 쉬워요.
첫째, 우리는 불과 태움이 나란히 일어나는 것만 볼 뿐, 둘을 잇는 필연의 끈은 본 적이 없어요.
둘째, 그래서 솜을 태우는 건 불이 아니라 매 순간 그렇게 원하는 신이라고 그는 봤어요.
이게 기회원인론이에요.
셋째, 아베로에스는 세상에 알아볼 수 있는 질서가 있다고 맞섰지만, 흐름은 되돌아오지 않았죠.
'늘 함께 일어남'과 '진짜 원인임'은 다르다는 이 물음은, 지금 우리가 인과를 말할 때도 되새겨 볼 만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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