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코멘트
0
개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가잘리는 《철학자들의 부조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던 이슬람 철학자들을 바로 그들 자신의 논리 규칙으로 몰아붙였어요. 이성만으로 신과 우주의 근원을 완벽히 증명했다는 그들의 큰소리가, 사실은 자기 규칙 안에서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걸 보여 준 책이에요.
친구가 "나는 규칙을 하나도 안 어긴다"고 자랑한다고 해 볼게요.
이때 가장 통쾌한 반박은 그 친구의 규칙집을 펴서 "여기, 네가 정한 규칙대로면 이건 틀렸잖아" 하고 짚어 주는 거예요.
알 가잘리(약 1058년~1111년)가 철학자들에게 한 일이 정확히 이거예요.
책의 원제는 《탸하푸트 알팔라시파(Tahāfut al-Falāsifa)》예요.
'탸하푸트'는 무너짐, 붕괴, 모순이라는 뜻이라 우리말로 '철학자들의 부조리' 또는 '철학자들의 모순'으로 옮겨요.
중요한 건 가잘리가 철학 전부를 미신이라고 몰아세운 게 아니라는 점이에요.
그는 "이성 하나로 신과 세계의 근원까지 다 증명했다"는 철학자들의 자만만 겨눴어요.
가잘리는 페르시아 투스 출신으로, 1091년에 당대 가장 명망 높은 자리인 바그다드 니자미야 학원 교수가 된 최고의 학자였어요.
그런 그가 교수로 지낸 4년 동안 이슬람 철학의 두 거장, 알파라비와 이븐 시나(라틴어로 아비센나)의 철학서를 깊이 읽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납득이 안 됐어요.
그 답답함이 바로 이 책으로 이어졌어요.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가잘리가 상대를 잘 모르고 비판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는 철학자들의 논리를 완전히 익힌 다음에 붓을 들었어요.
상대의 무기를 먼저 손에 쥐고, 그 무기로 상대를 겨눈 셈이에요.
가잘리가 노린 대상은 '팔라시파(falāsifa)'라 불린 사람들이에요.
8세기부터 11세기까지 그리스 철학을 이어받은 이슬람 철학자 집단인데, 대표 인물이 알파라비와 이븐 시나예요.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큰 스승으로 떠받들었죠.
| 팔라시파(철학자들)의 태도 | 가잘리의 반박 |
|---|---|
| 이성과 논리만으로 신과 우주의 근원을 증명할 수 있다 | 그 증명은 너희 논리로도 앞뒤가 안 맞는다 |
|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의 결론을 신앙보다 앞세운다 | 형이상학에서 그들의 확신은 근거가 약하다 |
가잘리는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강하게 거부했어요.
다만 그가 거부한 건 '증명되지 않은 것을 증명됐다고 우기는' 태도였지, 논리학이나 수학 같은 도구 자체는 아니었어요.
가잘리의 방법은 앞서 말한 대로 '상대의 규칙으로 이기기'예요.
철학자들이 자랑하던 논리학을 그대로 가져와, 그들의 형이상학이 그 논리를 스스로 어긴다고 짚었어요.
자주 드는 예가 목화와 불이에요.
철학자들은 "불이 목화를 태운다"를 자연의 필연 법칙이라 확신했어요.
하지만 가잘리는, 불이 목화에 닿는 것과 목화가 타는 것을 우리가 늘 함께 볼 뿐, 불이 그 원인임을 이성으로 완벽히 증명할 수는 없다고 파고들었어요.
그는 태우는 힘의 진짜 주인은 신이라고 봤는데(이를 기회원인론이라 불러요), 이 인과 이야기는 그 자체로 큰 주제라 여기서는 맛보기까지만 할게요.
한 가지 오해는 짚어 둘게요.
이 책 때문에 가잘리를 '반과학의 원흉'으로 보는 통념이 있지만, 학계에서는 논쟁 중이에요.
역사학자 피라스 알카티브는 가잘리의 뜻이 과학을 버리라는 게 아니라, 한 학자가 수학·과학을 잘한다고 해서 그의 모든 믿음까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말라는 경고였다고 봐요.
다음 세기에 이븐 루시드(라틴어로 아베로에스)가 반격에 나섰어요.
제목부터 응수하듯 《탸하푸트 알탸하푸트(Tahāfut al-Tahāfut)》, 곧 '부조리의 부조리'라는 긴 반박서를 썼죠.
그는 신이 자연법칙을 창조하긴 했지만, 사람에겐 "불이 목화를 태웠다"고 말하는 편이 더 유용하다고 맞섰어요.
창조에는 인간이 알아볼 수 있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입장이었어요.
하지만 반박이 나왔을 때 이슬람 사상의 큰 물길은 이미 가잘리 쪽으로 굳어진 뒤였어요.
그래서 《철학자들의 부조리》는 이슬람 인식론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평가돼요.
《철학자들의 부조리》는 가잘리가 철학을 미워해서 던진 돌이 아니에요.
그는 철학자들의 논리를 끝까지 익힌 뒤, 그 논리로 "이성 하나로 신과 우주를 다 증명했다"는 자만을 겨눴어요.
표적은 이븐 시나와 알파라비 같은 팔라시파였고, 무기는 상대의 규칙이었어요.
이븐 루시드가 '부조리의 부조리'로 되받았지만, 흐름은 이미 가잘리 쪽으로 기운 뒤였어요.
상대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상대의 규칙집을 펴서 그 안의 틈을 짚어낸 것, 그것이 이 책이 남긴 방법이었어요.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