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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사물의 크고 작음, 높고 낮음, 멀고 가까움은 그 자체로 정해진 게 아니라 무엇과 견주고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생각이에요. 혜시는 이걸 여러 명제로 보여 주며, 고정된 기준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상대적이라고 말했어요.
키가 180센티미터인 사람은 큰 걸까요, 작은 걸까요? 농구 선수들 사이에 서면 작아 보이고, 초등학교 교실에 서면 아주 커 보여요. 답이 하나로 딱 정해지지 않죠. 혜시(惠施, 기원전 370년경부터 310년경까지 활동)는 지금으로부터 약 2300년 전 중국 전국시대에 바로 이 점을 파고든 사람이에요.
그가 말한 사물상대성(事物相對性)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어요. 어떤 것이 크다·작다, 높다·낮다, 멀다·가깝다 하는 성질은 그 물건 안에 새겨져 있는 게 아니라, 무엇과 비교하고 어느 자리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예요. 혜시는 명가(名家)라는 학파의 대표 사상가였고, 그의 책은 전해지지 않아요. 대신 《장자》의 〈천하(天下)〉편에 '역물십사(歷物十事)'라는 열 개의 명제로 그 생각이 남아 있는데, 그중 여럿이 바로 이 상대성을 말합니다.
혜시는 이렇게 말했어요. 天与地卑,山与泽平 — "하늘과 땅은 나란하고, 산과 못은 평평하다"는 뜻이에요. 상식으로는 하늘이 위, 땅이 아래잖아요. 산은 높고 못은 낮고요. 그런데 왜 나란하다고 했을까요?
아주 높은 데서 내려다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비행기 창밖으로 보면 높은 산도 낮은 들판도 그냥 납작한 지도처럼 보이죠. '높다·낮다'는 우리가 땅 위 한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생기는 구별이에요. 보는 자리를 확 바꾸면 그 구별이 흐려집니다. 혜시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위아래조차 절대적인 게 아님을 이렇게 콕 찔러 보여 준 거예요.
중심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했어요. 我知天下之中央,燕之北,越之南也 — "나는 천하의 중앙을 아는데, 그것은 연나라의 북쪽이자 월나라의 남쪽이다"라고 했죠. 연나라는 북쪽, 월나라는 남쪽 나라였어요. 그러니 이 말은 '세상의 한가운데는 저 북쪽 끝에도 있고 저 남쪽 끝에도 있다'는 얘기예요.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면 쉬워요. 공 위에서는 어디든 '여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중심이란 자리는 정해진 게 아니라 내가 어디 서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거예요.
혜시는 시간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댔어요. 가장 유명한 명제가 今日适越而昔来 — "오늘 월나라에 갔다가 어제 돌아왔다"예요. 말이 안 되는 것 같죠? 갔다 온 게 오늘인데 어떻게 돌아온 게 어제일 수 있을까요.
'오늘'과 '어제'라는 말을 떠올려 보세요. 이건 정해진 순간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서 있는 시점에서 붙이는 이름이에요. 내가 지금 "오늘"이라고 부르는 이 날은, 내일이 되면 "어제"가 돼요. 같은 하루인데 언제 말하느냐에 따라 이름이 바뀌죠. 시간의 앞뒤도 고정된 게 아니라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예요.
또 日方中方睨 — "해는 중천에 뜨면서 동시에 기운다"고 했어요. 해가 정확히 남중하는 그 순간, 사실 이미 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떠오름'과 '기욺'을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없다는 거죠. 南方无穷而有穷 — "남쪽은 끝이 없으면서 끝이 있다"는 말도 같은 결이에요. '끝없다·끝있다'조차 어떻게 재느냐에 달렸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어요.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게 있어요. 혜시가 "그럼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고 다 똑같다"고 말한 건 아니에요. 그건 다른 명제인 합동이(合同異)나 만물을 하나로 보는 이야기와 이어지는 대목이라, 여기서는 접어 둘게요.
사물상대성만 놓고 보면 요점은 이거예요. 우리가 '크다·작다', '위·아래', '오늘·어제'처럼 절대적인 기준인 척하는 말들을 쓰지만, 그 기준은 늘 비교와 관점에 기대어 있다는 것. 아래 표처럼 정리하면 한눈에 들어와요.
| 상식이 말하는 것 | 혜시가 뒤집은 것 |
|---|---|
| 하늘은 위, 땅은 아래 | 보는 자리에 따라 나란하다 |
| 세상엔 정해진 중심이 있다 | 어디서든 여기가 중심이 될 수 있다 |
| 오늘과 어제는 딱 나뉜다 | 말하는 시점에 따라 이름이 바뀐다 |
한 가지 짚어 둘 점은, 이 명제들이 증명 과정 없이 결론만 열 줄로 전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여러 갈래로 해석했고, 마치 서양의 제논이 낸 역설들처럼 '이게 무슨 뜻이냐'를 두고 오래 논쟁이 이어졌어요. 우리가 읽는 풀이도 그런 해석 중 하나라는 걸 기억하면 좋아요.
혜시의 이야기는 옛날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오늘 우리 삶에도 그대로 닿아요. 시험 점수 80점이 잘한 걸까요? 반 평균이 60점이면 잘한 거고, 90점이면 아쉬운 거예요. 월급도, 집 크기도, 성적도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이 정해져 있지 않고 늘 무언가와 견주는 순간 정해지죠.
혜시가 주는 선물은 이거예요. 어떤 판단이 절대적인 진실처럼 느껴질 때, 잠깐 멈춰서 '이건 어느 자리에서 본 걸까'를 물어보게 해 준다는 것. 자리를 바꿔 보면 크던 게 작아지고, 끝이던 게 한가운데가 되기도 하니까요.
혜시의 사물상대성은 사물의 크고 작음, 높고 낮음, 멀고 가까움, 오늘과 어제가 그 자체로 정해진 게 아니라 무엇과 견주고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생각이에요. "하늘과 땅은 나란하다", "천하의 중앙은 연나라 북쪽이자 월나라 남쪽", "오늘 갔다가 어제 왔다" 같은 명제가 이를 보여 주죠. 그의 책은 남지 않았고 《장자》 〈천하〉편의 역물십사로만 전해지며, 증명 없이 결론만 있어 해석의 여지가 크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 두면 좋겠어요. 다음에 무언가를 '크다·작다' 딱 잘라 말하고 싶어질 때, 혜시라면 '어느 자리에서요?'라고 되물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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