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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좋아하는 만화책을 한 권 떠올려 보세요. 너무 좋아서 옆에 작은 노트를 두고, 어려운 장면마다 '이건 이런 뜻이야' 하고 풀어 적는다고 해 볼게요. 친구가 그 만화를 처음 볼 때 노트를 같이 건네주면, 친구도 어렵지 않게 따라 읽을 수 있겠죠. 약 800년 전, 한 사람이 딱 이 일을 평생에 걸쳐 했어요. 대상은 만화책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옛 그리스 철학자의 책 전부였고요. 그 사람 이름이 이븐 루시드예요.
이븐 루시드는 1126년에 지금의 스페인 남부 코르도바에서 태어났어요. 그때 그곳은 이슬람 사람들이 다스리던 땅이라, 그는 이슬람 문화 안에서 자랐죠. 놀라운 건 그가 한 가지 일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낮에는 환자를 보는 의사였고, 도시의 재판을 맡는 판사이기도 했어요. 그러면서도 시간이 나면 책상에 앉아 철학책을 읽고 또 읽었죠. 라틴어를 쓰던 먼 훗날의 유럽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서 '아베로에스'라고 불렀어요.
여기서 '주석'이라는 말을 한 번 짚고 갈게요. 주석은 어려운 글 옆에 다는 풀이예요. 교과서에서 모르는 단어 밑에 작은 글씨로 뜻을 달아 둔 거, 본 적 있죠? 그게 바로 주석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은 2000년도 더 전에 쓰여서 문장이 짧고 딱딱하고, 중간이 자주 끊겨 있어요. 그냥 읽으면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렵죠. 이븐 루시드는 그 책을 한 문장씩 옮겨 적고, 바로 아래에 '이 문장은 사실 이런 뜻이에요' 하고 자기 말로 풀어 썼어요.
이븐 루시드의 주석은 길이가 세 종류였어요. 짧게 요약한 것, 중간 길이의 것, 그리고 가장 긴 것. 그 가장 긴 주석이 바로 '대주석'이에요. 대주석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을 통째로 먼저 적고, 그 한 줄 한 줄을 빠짐없이 풀어 줬어요. 『형이상학』이나 『영혼에 관하여』처럼 어려운 책들을 이렇게 다뤘죠. 한 문장을 설명하려고 몇 쪽을 쓰기도 했어요. 마치 선생님이 칠판에 적힌 문제 한 줄을 두고 30분 동안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처럼요.
왜 이게 그렇게 중요할까요? 이븐 루시드가 살던 무렵, 유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거의 잊고 있었어요. 그리스어로 된 원본이 흩어지고 사라진 거죠. 그런데 이슬람 세계에는 그 책들이 번역되어 살아 있었고, 이븐 루시드의 친절한 풀이까지 함께 붙어 있었어요. 이 주석이 라틴어로 옮겨지자, 유럽 학자들은 비로소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읽기 시작했어요. 그것도 이븐 루시드의 설명을 길잡이로 삼아서요.
유럽의 학자들은 그를 어찌나 믿었던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냥 '그 철학자'라 부르고 이븐 루시드는 '그 주석가'라고만 불렀어요.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 다 알았다는 뜻이죠. 훗날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큰 학자도 그의 주석을 옆에 두고 공부했어요. 이븐 루시드는 1198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노트는 바다 건너 유럽에서 수백 년을 더 일한 셈이에요.
이븐 루시드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어렵고 오래된 책을 한 줄 한 줄 풀어 설명한 사람이에요. 그중에서도 가장 꼼꼼한 풀이가 바로 '대주석'이고요. 유럽이 잊고 있던 그 책을, 이븐 루시드의 친절한 설명이 다시 살려 냈어요. 좋아하는 책 옆에 노트를 다는 작은 정성이 800년 뒤 세상의 공부 방향까지 바꿀 수 있다는 걸, 그가 보여 준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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