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반에서 제일 얄미운 친구가 있다고 해 볼게요. 말투도 거슬리고 평소에 영 정이 안 가요. 그런데 그 친구가 수학 문제 푸는 법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알아요. 자,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쟤 미우니까 저 방법도 안 배워"라고 할까요, 아니면 "쟤는 미워도 저 방법은 좋네"라고 할까요?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조선에 살던 박지원이라는 사람이 딱 이 고민을 나라 단위로 했어요. 그가 던진 질문은 간단해요. 미운 상대라고 해서, 그쪽의 좋은 것까지 다 미워해야 할까요?
박지원은 1737년에 태어나 1805년까지 살았던 조선 후기의 학자예요. 호가 연암이라서 연암 박지원이라고도 불러요.
그 무렵 조선 사람들은 청나라를 몹시 싫어했어요. 청나라는 원래 만주에서 일어난 나라인데, 조선이 떠받들던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의 주인이 됐거든요. 게다가 1636년에는 조선에 쳐들어와 임금이 무릎을 꿇기까지 했어요. 그러니 조선 양반들은 청나라를 사람 취급도 안 하고 '오랑캐'라고 불렀어요. 오랑캐란 예의도 글도 모르는 미개한 무리라는 뜻으로 쓰던 말이에요.
그런데 박지원이 마흔네 살이던 1780년, 직접 청나라 수도까지 다녀올 기회가 생겨요. 사신단을 따라 몇 달에 걸쳐 압록강을 건너 베이징을 지나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던 열하라는 곳까지 갔어요. 이 여행을 적은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열하일기'예요.
오랑캐의 나라라고 깔보며 떠난 길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국경을 넘자마자 박지원은 깜짝 놀라요.
시골의 작은 마을인데도 집들이 가지런한 벽돌로 단단하게 지어져 있었어요. 길에는 짐을 잔뜩 실은 수레가 쌩쌩 다니고, 깨진 기와 조각이나 똥거름조차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 알뜰하게 쓰고 있었어요. 조선에서는 흙벽이 비에 무너지고, 수레가 다닐 길조차 변변치 않던 때였어요.
박지원은 솔직하게 적어요. 우리가 오랑캐라 비웃는 저들이, 정작 백성을 더 잘 살게 하는 기술을 갖고 있다고요. 그러면서 유명한 말을 남겨요. 부끄러운 것은 저들에게 배우지 못하는 우리라고요.
자, 여기서 박지원 생각의 '내부 구조'가 드러나요. 얼핏 들으면 "미운 오랑캐에게 배우자"는 말은 앞뒤가 안 맞는 억지처럼 들려요. 이렇게 말이 안 되는 듯 보이는데 알고 보면 맞는 말을, 어려운 말로 역설이라고 해요.
박지원은 이 역설을 두 칸으로 나눠서 풀어요. 한 칸에는 '누가 만들었나'를 놓고, 다른 칸에는 '그것이 쓸모 있나'를 놓아요. 벽돌이 튼튼한 것은 그걸 만든 사람이 오랑캐냐 아니냐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좋은 수레는 누가 끌어도 좋은 수레예요.
그러니까 박지원은 "청나라가 옳다"고 한 게 아니에요. "미워하는 마음"과 "배우는 일"은 서로 다른 서랍에 넣어야 한다고 본 거예요. 마음으로는 분해도, 손으로는 좋은 것을 가져와 우리 백성을 따뜻하고 배부르게 하면 그게 진짜 이기는 길이라는 거죠. 이렇게 도구를 편리하게 쓰고 삶을 넉넉하게 만들자는 생각을 이용후생이라고 불러요. 백성의 실제 살림을 챙기자는 학문, 곧 실학의 핵심이에요.
그런데 박지원은 이 생각을 딱딱한 주장으로만 펴지 않았어요. 재미난 이야기에 슬쩍 숨겨서 던졌어요.
예를 들어 '허생전'에서는 글만 읽던 선비가 장사로 큰돈을 벌어, 입으로만 명분을 떠드는 양반들을 머쓱하게 만들어요. '호질'에서는 점잖은 척하던 선비가 호랑이 앞에서 본색을 들키죠. 겉으로는 우습고 통쾌한 이야기지만, 속뜻은 한결같아요. 말로만 오랑캐를 비웃으며 정작 백성은 굶기는 어른들, 그 모습이 더 부끄럽지 않냐고 콕 찌르는 거예요. 이렇게 웃음 속에 따끔한 비판을 담는 것을 풍자라고 해요.
박지원이 한 일은 결국 미움과 배움을 따로 떼어 놓은 거예요. 청나라가 미운 건 미운 대로 두되, 그 나라의 벽돌과 수레와 알뜰함은 부끄러워 말고 배워 오자고 했어요. 누가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백성에게 쓸모가 있느냐로 따지자는 것, 그것이 '오랑캐에게 배우자'는 역설의 속 구조예요. 그리고 그 생각을 딱딱한 설교가 아니라 웃기는 이야기로 풀어, 읽는 사람이 스스로 뜨끔하게 만들었고요. 다음에 미운 사람한테 배워야 할 일이 생기면, 200년 전 박지원이 벽돌 한 장 앞에서 했던 고민을 떠올려 봐도 좋겠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