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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놀이공원이나 사진관에 가면 사방이 거울인 방이 있어요. 그 안에 들어서면 내 모습이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끝없이 비쳐요. 게다가 앞 거울에는 뒤 거울에 비친 내 모습까지 또 담겨요. 거울 하나하나가 나머지 거울을 전부 품고 있는 셈이에요. 어느 게 진짜고 어느 게 비친 건지 따지는 게 슬슬 우스워질 정도죠.
천삼백 년쯤 전 신라에 이 거울 방 같은 생각을 평생 붙들고 산 스님이 있었어요. 이름은 의상이에요. 그가 가장 아끼던 말이 바로 '원융무애'였고요. 글자만 보면 딱딱하지만, 방금 그 거울 방을 떠올리면 절반은 이해한 거예요. 이제 그 절반을 채워 볼게요.
의상은 625년에 태어나 702년에 세상을 떠난 신라 스님이에요. 우리 나이로 일흔여덟까지 살았으니, 그 시절엔 꽤 오래 산 편이에요. 젊을 때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서 바다 건너 당나라(지금의 중국)로 유학을 떠났어요. 거기서 '화엄'이라는 가르침을 배웠고, 십 년 가까이 익힌 끝에 신라로 돌아왔어요.
돌아온 의상은 영주에 부석사라는 절을 세우고 제자들을 길렀어요. 이 사람을 두고 흔히 '한국 화엄종을 연 스님'이라고 불러요. 화엄종은 '화엄경'이라는 불교 경전을 중심에 두는 갈래인데, 그 두꺼운 가르침의 핵심을 의상은 딱 한마디로 줄여서 들고 다녔어요. 그게 원융무애예요. 그러니까 의상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도 이 네 글자를 푸는 거예요.
원융무애는 한자 네 글자예요. '원융'은 둥글게 하나로 녹아든다는 뜻이고, '무애'는 걸림이 없다는 뜻이에요. 합치면 '서로 막힘없이 녹아들어 하나가 된다' 정도가 돼요.
설탕을 떠올려 볼게요. 따뜻한 물에 설탕을 넣고 저으면 알갱이가 사라져요. 그런데 정말 없어진 게 아니라 물 구석구석에 다 퍼진 거예요. 이제 그 물은 어느 한 모금을 떠도 달아요. 설탕이 물 전체에 들어갔고, 물 한 방울에도 설탕이 들어 있는 거죠. 부분과 전체가 서로를 품은 이 모습이 원융무애가 말하려는 그림이에요.
우리는 보통 큰 것과 작은 것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해요. 바다는 크고 물방울은 작다고요. 그런데 물방울 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바다의 성질이 그대로 들어 있어요. 짠맛도, 출렁이는 성질도요. 의상은 이걸 더 또렷하게 말했어요. "하나 안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안에 하나가 있다." 작은 먼지 한 톨에도 온 우주가 비치고, 온 우주가 그 먼지 한 톨에 기대고 있다는 거예요. 거울 방에서 거울 하나가 나머지 전부를 담고 있던 것과 똑같죠.
의상은 이 큰 이야기를 글로 길게 늘어놓지 않았어요. 대신 '화엄일승법계도'라는 한 장의 그림을 만들었어요. 한자 210글자를 네모난 도장 모양으로 구불구불 배열한 그림이에요. 시 한 편을 미로처럼 접어 넣었다고 보면 돼요.
이 그림에는 재미있는 약속이 있어요. 글자가 한가운데에서 시작해서, 길을 따라 빙빙 돌다가, 다시 한가운데로 돌아와 끝나요. 시작하는 글자와 끝나는 글자가 같은 자리에 모여요. 한 붓으로 죽 이어 그릴 수 있는 미로처럼, 길이 한 번도 끊기지 않아요.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처음과 끝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걸 눈으로 보여 주려던 거예요. 우리는 보통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끝이 곧 처음으로 돌아와요. 부분과 전체가 하나이듯, 처음과 끝도 둥글게 이어져 있다는 거죠. 말로 설명하기 까다로운 원융무애를, 의상은 길 하나로 그려서 보여 준 셈이에요. 글을 못 읽는 사람도 그림의 모양만 보면 '아, 끝이 없이 도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게요.
천삼백 년 전 스님의 이야기가 나랑 무슨 상관인가 싶을 수 있어요. 그런데 원융무애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어요.
내가 아침에 먹은 밥 한 그릇을 떠올려 봐요. 그 쌀은 농부가 키웠고, 농부는 햇빛과 비의 도움을 받았고, 비는 바다에서 올라온 물이었어요. 밥 한 그릇 안에 해와 비와 흙과 수많은 사람의 손이 다 들어 있는 거예요. 따로 떨어져 사는 것 같아도, 사실 모든 게 서로 기대어 연결돼 있다는 깨달음, 그게 의상이 천삼백 년 전부터 하고 싶던 말이에요.
이렇게 보면 작은 것을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워져요. 먼지 한 톨, 친구 한 명, 풀 한 포기에도 온 세상이 이어져 있으니까요. 그래서 원융무애는 단순히 어려운 불교 용어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한 가지 눈이에요. 나 혼자 잘나서 사는 사람은 없고, 작아 보이는 것 안에도 온 세상이 담겨 있다는 눈이요.
원융무애는 '서로 막힘없이 녹아들어 하나가 된다'는 말이에요. 사방이 거울인 방처럼, 또 설탕이 녹은 물처럼, 부분 하나가 전체를 품고 전체가 부분 하나에 담기는 모습을 가리켜요. 신라 스님 의상은 이 생각을 화엄일승법계도라는 한 장의 그림에 담아, 처음과 끝이 둥글게 이어지는 길로 보여 줬어요. 어렵게 외울 말이 아니라, 밥 한 그릇에도 온 세상이 들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눈이라고 기억하면 충분해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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