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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종이 한 장에 한자 210개가 빽빽하게 적혀 있어요. 그런데 이게 좀 이상해요. 보통 시처럼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게 아니거든요. 글자들이 네모난 미로처럼 구불구불 꺾이면서 이어져 있어요. 한가운데서 출발해 길을 따라 손가락으로 짚어 가다 보면, 신기하게도 다시 한가운데로 돌아와요. 어릴 때 종이에 그린 미로를 연필로 더듬어 빠져나가던 놀이, 딱 그 모양이에요.
이 별난 시의 이름이 '법성게'예요. 그리고 이걸 만든 사람이 신라 스님 의상이고요. 시 한 편을 왜 이렇게 미로처럼 꼬아 놓았을까요. 그냥 멋 부린 걸까요. 사실 이 모양 안에 의상이 평생 붙잡고 있던 한 가지 생각이 숨어 있어요.
의상은 625년에 태어나 702년에 세상을 떠난 신라 사람이에요. 일흔일곱까지 살았으니 그 시대엔 꽤 오래 산 편이지요. 젊을 때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서 배를 타고 당나라, 그러니까 지금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어요.
그곳에서 '화엄경'이라는 아주 두꺼운 불교 경전을 평생 파고든 지엄이라는 스승을 만나 배웠어요. 화엄경은 한마디로, 부처가 깨달은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어마어마하게 큰 스케일로 그려 낸 책이에요.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이 묶인 분량이라, 그 시절 사람이 통째로 외우고 풀어낸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의상은 668년, 그 두꺼운 화엄경의 알맹이를 딱 210자로 압축했어요. 일곱 글자씩 한 줄, 그게 서른 줄, 합쳐서 210자. 웬만한 노랫말 한 곡보다도 짧아요. 이 짧은 시 안에 책 여러 권의 핵심을 욱여넣은 거예요.
그러고는 이 글자들을 네모난 도장 무늬처럼 한 줄로 죽 이어 배열했어요. 그렇게 글자가 미로처럼 감긴 그림 전체를 '화엄일승법계도'라고 부르고, 그 길을 따라 읽히는 시가 바로 '법성게'예요. 그림과 시가 한 몸인 셈이지요. 의상은 이 한 장으로 한국 화엄 불교의 출발점을 찍었어요.
법성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은 이거예요. "하나 안에 모두가 있고, 모두 안에 하나가 있다." 말이 좀 어렵지요. 쉽게 그려 볼게요.
마주 보는 두 거울 사이에 사과 하나를 놓으면, 거울 속에 사과가 끝없이 비치고 또 비쳐요. 작은 거울 한 칸 안에도 방 전체가 다 들어와 있고요. 또 빗방울 하나에 하늘과 구름이 통째로 비치는 걸 본 적 있을 거예요. 작은 것 하나에 큰 세상이 통째로 담긴다는 느낌, 그게 법성게가 하려는 말이에요. 실제로 "한 톨의 먼지 안에 온 세상이 들어 있다"는 구절도 있어요. 아주 작은 것과 아주 큰 것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품고 있다는 거예요.
이제 미로 모양의 비밀이에요. 이 그림은 첫 글자인 '법'에서 출발해요. 그리고 길을 다 돌고 나면 마지막 글자인 '부처'에 닿는데, 이 첫 글자와 끝 글자가 둘 다 그림 한가운데, 바로 옆자리에 놓여 있어요. 출발점과 도착점이 같은 칸인 거예요.
왜 이렇게 했을까요. 시작과 끝이 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 결국 한자리에서 만난다는 생각을 눈에 보이게 그린 거예요. 글로 백 번 설명하는 대신, 손가락으로 한 바퀴 따라가 보면 몸이 먼저 알아채요. 길을 다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 '아, 떨어진 게 하나도 없구나' 하고 느끼게 만든 거지요. 어려운 철학을 머리가 아니라 손끝으로 가르치는 방법이었어요.
공부를 마친 의상은 670년 무렵 신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676년에 경상북도 영주에 부석사라는 절을 세웠어요. 지금도 사람들이 찾아가는, 천 년이 훌쩍 넘은 오래된 절이에요. 이곳을 중심으로 의상은 제자를 길러 한국 화엄종을 활짝 열었어요. 가까이서 배운 핵심 제자만 열 명을 꼽을 정도였고요.
절 이름 '부석'은 '뜬 돌'이라는 뜻인데, 의상을 지키려던 선묘라는 여인이 용으로 변해 큰 바위를 공중에 띄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요. 이건 사실이라기보다 오래 입에서 입으로 내려온 전설이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의상을 특별하게 기억했다는 증거이기도 해요.
의상은 두꺼운 화엄경을 단 210자의 시 한 편으로 줄이고, 그 글자를 미로처럼 감아 한가운데서 시작해 한가운데로 돌아오게 그렸어요. 그게 화엄일승법계도이고, 그 안의 시가 법성게예요. 미로 모양은 멋이 아니라 메시지였어요. 작은 것 하나에 온 세상이 담겨 있고, 시작과 끝도 결국 한자리에서 만난다는 생각을, 읽는 사람이 손끝으로 직접 더듬어 깨닫게 한 거예요. 어려운 가르침을 누구나 따라 그릴 수 있는 한 장으로 바꿔 놓은 것, 그게 신라 스님 의상이 남긴 솜씨예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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