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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친구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려요. 그 순간 "여기 내가 있어" 하는 느낌이 아주 분명하게 들죠. 그런데 누가 "그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라고 하면 갑자기 막막해져요. 머리를 가리켜야 할까요, 가슴을 가리켜야 할까요?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콕 집어 보여 줄 수가 없어요. 약 1800년 전 인도에 살았던 한 사람은 바로 이 이상한 느낌을 평생 붙들고 늘어졌어요. 그 사람 이름이 아리아데바, 한자식 이름으로는 제바라고도 불려요.

아리아데바는 혼자 뚝 떨어져 나온 사람이 아니에요. 그에게는 나가르주나라는 아주 유명한 스승이 있었어요. 나가르주나는 "세상 어떤 것도 홀로 단단하게, 변하지 않고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또렷하게 정리한 사람으로, 불교 철학에서는 큰 산 같은 인물이에요. 그가 세운 흐름을 중관학파라고 부르는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 길을 살핀다는 뜻이에요. 아리아데바는 바로 그 스승의 수제자였어요. 스승이 큰 길을 닦아 놓았다면, 아리아데바는 그 길을 더 깊고 더 날카롭게 파고든 사람이죠. 전해지기로는 그는 토론을 아주 잘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말로 겨루면 좀처럼 지지 않았다고 해요. 그가 남긴 대표작은 짧은 시 사백 편을 모은 책인데, 우리말로는 사백론이라고 불러요. 이 글들은 훗날 중국과 우리나라에까지 전해져, 한 불교 학파가 기둥으로 삼는 바탕 글 가운데 하나가 되었어요.

여기서 재미있는 점이 있어요. 보통 똑똑한 사람은 "내 생각이 옳다"며 멋진 주장을 큰 소리로 내세우잖아요. 그런데 아리아데바의 방식은 정반대였어요. 그는 새 주장을 쌓아 올리기보다, 사람들이 너무 당연해서 의심조차 안 하는 믿음을 하나씩 조심스레 뜯어봤어요. 장난감 자동차를 떠올려 봐요. 바퀴를 빼고, 문을 떼고, 지붕을 들어내고, 의자를 꺼내고… 이렇게 부품을 하나씩 분해하다 보면 "자동차 그 자체"라는 알맹이가 어디서 따로 툭 튀어나오지 않아요. 부품들이 잠깐 모여 있을 때 우리가 편하게 "자동차"라고 불렀을 뿐이죠. 아리아데바는 바로 이 분해하는 눈을 들고, 가장 가깝고 가장 의심하기 어려운 "나"라는 것을 들여다봤어요.

자, 그럼 "나"를 한번 천천히 뜯어볼까요. 이 몸이 나일까요? 그런데 몸은 어제와 오늘이 조금씩 달라요. 머리카락은 빠지고 손톱은 자라고, 어릴 적 사진 속 작은 몸은 지금과 많이 다르죠. 그럼 내 생각이 나일까요? 생각은 더 빨리 바뀌어요. 방금 기뻤다가 금세 짜증이 나기도 하니까요. 몸도 마음도 쉬지 않고 변하는데, 그 뒤에 변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진짜 주인 나"가 따로 숨어 있을까요? 아리아데바는 아무리 찾아 들어가도 그런 단단한 주인은 끝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봤어요. "나"는 양파를 닮았어요. 껍질을 다 벗기면 가운데에 진짜 알맹이가 따로 나오는 게 아니라, 껍질들이 겹겹이 모인 그것이 바로 양파였던 거예요. 이것이 그가 파고든 자아 관념의 해체예요. 나를 없애 버리자는 무서운 말이 아니라, 우리가 굳게 믿어 온 "고정된 나"라는 생각이 사실은 여러 조각이 모여 만들어진 것임을 차분히 보여 주는 일이죠.

이 이야기가 그냥 머리만 굴리는 놀이처럼 들릴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아리아데바가 이 일에 그토록 매달린 데는 이유가 있었어요. 우리는 "고정된 나"를 지키려다 자주 많이 괴로워하거든요. 누가 내 흉을 보면 "감히 나를!" 하고 발끈하고, 내 것을 빼앗기면 오래오래 분해하죠. 그런데 그렇게 목숨 걸고 지키려는 "나"가 사실은 양파처럼 따로 떼어 낼 알맹이가 없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그 단단하던 화와 집착도 조금은 헐거워질 수 있어요. 아리아데바에게 자아를 뜯어보는 일은 자기가 얼마나 똑똑한지 뽐내는 게 아니라, 마음에 진 무거운 짐을 한 겹 덜어 내는 길이었어요.

아리아데바는 스승 나가르주나의 뒤를 이어, "나는 정말 어디에 있을까"를 끈질기게 캐물은 사람이에요. 그는 새로운 답을 멋지게 내세우는 대신, 몸도 생각도 쉴 새 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하나씩 보여 주며 그 뒤에 숨어 있다는 "고정된 나"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고 했어요. 양파 껍질을 다 벗겨도 따로 알맹이가 없듯이요. 이것은 나를 부정하는 차가운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 꽉 쥐고 있던 "나"라는 생각을 한 번 슬쩍 펴 보자는 다정한 제안에 가까워요. 이름을 부르면 돌아보는 그 느낌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 느낌의 주인이 정말 누구인지는 다시 한 번 천천히 들여다볼 만하니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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