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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학교에서 가장 잘 가르치시는 선생님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그 선생님이 여러분 앞에서 그동안 내가 알던 게 좁았구나, 이 문제는 네가 옳으니 이제 내가 너한테 배우마, 하고 말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죠. 보통은 나이도, 자리도, 아는 것도 선생님 쪽이 위라고 여기니까요. 그런데 지금부터 약 1600년 전에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졌어요. 그것도 한순간의 변덕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가 한 달이 넘도록 진지하게 맞붙어 따진 끝에 말이에요. 그 제자의 이름이 쿠마라지바예요. 오늘은 이 사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따라가 볼게요.

쿠마라지바는 344년부터 413년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승려예요. 지금 중국의 서쪽 끝, 옛날 실크로드가 지나가던 길목의 구자라는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어요. 이 사람이 이름을 남긴 건 번역 덕분이에요. 인도 말로 적힌 어려운 불교 경전을 한문으로 옮기는 일을 했는데, 단어만 갈아 끼운 게 아니라 중국 사람이 소리 내어 읽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문장으로 새로 빚어냈어요. 오늘날 우리가 듣는 불교 낱말 상당수가 그의 손끝을 거쳤지요. 두 세계 사이에 튼튼한 다리를 놓은 사람이라고 보면 돼요.

그가 스승과 무엇을 두고 다퉜는지 알려면, 불교 안에 큰길이 둘 있었다는 걸 먼저 알아야 해요. 하나는 소승, 작은 수레라는 뜻이에요. 나부터 열심히 닦아서 내 괴로움부터 벗어나자는 길이죠. 다른 하나는 대승, 큰 수레예요. 혼자 타는 쪽배가 아니라 모두를 함께 태우는 큰 나룻배처럼, 세상 사람 전부를 같이 건너게 하자는 길이고요. 둘 다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무엇을 먼저 보느냐가 달랐어요. 그리고 어린 쿠마라지바는 작은 배 쪽을 먼저, 아주 깊이 배웠어요.

그에게 작은 배의 가르침을 단단히 새겨 준 스승이 반두달다예요. 쿠마라지바는 아홉 살 무렵부터 어머니를 따라 멀리 카슈미르까지 가서 이 스승 밑에서 경전을 외우고 또 외웠어요. 반두달다는 그 지역에서 이름난 학자였고, 어린 제자의 영리함을 무척 아꼈어요. 둘 사이는 그러니까 그냥 가르치고 배우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 깊이 믿고 따르는 사이였던 거예요. 이 점을 기억해 두세요. 나중 이야기가 더 놀랍게 다가오거든요.

그런데 고향 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쿠마라지바는 수리야소마라는 또 다른 스승을 만나요. 여기서 처음으로 큰 배, 즉 대승의 핵심인 공 이야기를 듣게 돼요. 공은 한자로 비어 있다는 뜻이라, 처음 들으면 그럼 아무것도 없다는 거야 싶어요. 하지만 뜻은 좀 달라요. 어떤 것도 혼자 동떨어져 딱 정해진 채로 있지는 않다는 말이거든요. 예를 들어 누가 형인 건 동생이 있기 때문이지, 몸 안에 형이라는 알맹이가 따로 들어 있어서가 아니잖아요. 키가 크다는 말도 옆 사람과 견주어야 나오는 말이고요. 세상 모든 게 이렇게 서로 기대어 있을 뿐이라는 것, 그게 공이에요. 쿠마라지바는 이 생각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어요.

문제는 옛 스승 반두달다였어요. 자기가 아끼던 제자가 자기가 가르친 것과 다른 길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먼 길을 걸어 직접 찾아와요. 반두달다가 보기에 공은 그저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한 소리 같았거든요. 아무것도 없다면서 뭐 하러 그렇게 애써 수행하느냐는 거죠. 두 사람은 마주 앉아 따지기 시작했어요.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한 달이 넘도록요. 쿠마라지바는 차분하게 되물었어요. 비어 있다는 건 없다는 게 아니라, 무엇이든 혼자 고정돼 있지 않아서 변하고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라고요. 컵이 비어 있어야 물을 담을 수 있듯이, 정해진 게 없어서 오히려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고요.

오래 다툰 끝에, 마침내 마음을 돌린 쪽은 제자가 아니라 스승이었어요. 반두달다는 제자의 말이 옳다는 걸 받아들이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져요. 그대는 나의 큰 배 스승이고, 나는 그대의 작은 배 스승일세. 내가 너에게 작은 배를 가르쳤지만 큰 배는 네가 나를 가르쳤으니, 우리는 서로의 스승이라는 뜻이에요. 누가 이기고 누가 졌다가 아니라, 더 옳은 것 앞에서는 스승 자리도 기꺼이 비울 수 있다는 마음이죠. 가르친 사람이 배운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인 거예요.

이 사제의 다툼은 한 집안일로 끝나지 않았어요. 쿠마라지바는 나이 쉰 무렵 멀리 중국 장안으로 불려 가, 수많은 학승과 함께 큰 번역 작업을 맡게 돼요. 우리가 이름은 들어 봤을 법화경이나 금강경 같은 경전, 그리고 공을 촘촘하게 따져 설명한 중관 사상의 책들이 이때 그의 손을 거쳐 한문으로 자리 잡았어요. 스승과 제자가 마주 앉아 끝까지 따져 다듬은 그 공이라는 생각이, 번역을 타고 중국과 한국, 일본으로 퍼져 나간 셈이죠. 한 사람의 마음을 바꾼 작은 논쟁이, 결국 수백 년 동안 동아시아가 불교를 말하는 언어 자체를 바꿔 놓은 거예요.

쿠마라지바 이야기에서 기억할 건 화려한 승부가 아니에요. 가르치던 사람과 배우던 사람이 한 달 넘게 진지하게 따졌고, 그 끝에 더 옳은 쪽을 따라 스승이 제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는 거예요. 나이나 자리가 아니라 더 나은 생각이 기준이 된 거죠. 그리고 그 더 나은 생각의 핵심이던 공, 곧 모든 것은 혼자가 아니라 서로 기대어 있다는 시선은, 훗날 쿠마라지바의 번역을 타고 동아시아 불교의 바탕 언어가 됐어요. 가끔은 누구의 말이냐보다 어떤 말이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1600년 전 두 사람이 먼저 보여 준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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