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스마트폰을 한 번도 못 본 사람에게 그걸 설명한다고 해 봐요. 그 사람이 이미 아는 말부터 빌릴 수밖에 없어요. "손바닥만 한 작은 텔레비전인데, 거기로 편지도 보내고 길도 찾고…" 이렇게요. 딱 맞는 말이 없으니, 곁에 있는 익숙한 말로 더듬더듬 옮기는 거죠.
약 1600년 전 중국이 꼭 이랬어요. 인도에서 불교라는 낯선 생각이 들어왔는데, 그 핵심 단어들이 중국말에는 아예 없었거든요. 그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게 '공(空)'이었어요. 비어 있다는 뜻의 이 글자 하나에, 인도 사람들은 엄청나게 깊은 생각을 욱여넣어 두었어요. 이걸 중국말로 어떻게 옮기느냐가 큰 숙제였죠. 그리고 이 숙제를 가장 멋지게 풀어낸 사람이 바로 승조예요.

승조는 384년에 태어나 414년,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떠난 짧은 삶의 사람이에요. 중국 장안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남의 글씨를 베껴 주는 일로 먹고살았어요. 그런데 이 일이 뜻밖의 행운이었어요. 베끼는 동안 온갖 책을 공짜로 다 읽게 됐거든요.
처음엔 노자와 장자의 책에 푹 빠졌어요. 노자와 장자는 중국에서 "도(道)"를 말한 아주 오래된 사상가들인데, 세상의 근본을 '없음', 즉 '무(無)'로 설명하길 좋아했어요. 그러다 승조는 우연히 불교 경전 한 권을 읽고 마음을 완전히 돌려요. 결국 그 시대 최고의 번역가였던 구마라집을 찾아가 그의 수제자가 됩니다. 노자 장자도 훤히 알고, 인도 불교도 깊이 아는 사람. 두 세계를 잇기에 이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여기서 잠깐, 공이 뭔지부터 그려 볼게요. '공'을 그냥 "아무것도 없다"로 들으면 큰 오해예요.
강물에 생기는 소용돌이를 떠올려 봐요. 소용돌이는 분명 거기 있어요.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도 있죠. 그런데 그게 따로 떼어 낼 수 있는 '물건'인가요? 아니에요. 그냥 물이 그렇게 돌고 있을 뿐, 소용돌이라는 단단한 알맹이는 어디에도 없어요. 물이 멈추면 소용돌이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요.
공이 말하는 게 바로 이거예요. 세상 모든 것은 소용돌이처럼 여러 조건이 잠깐 모여 그렇게 보일 뿐, 영원히 변치 않는 자기만의 알맹이는 없다는 거예요. 있긴 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식으로 '딱 정해진 채로' 있지는 않다는 거죠. 그러니 공은 '없음'이 아니라 '고정된 알맹이가 없음'이에요. 이 미묘한 차이가 이야기 전체의 열쇠예요.

그런데 이 미묘한 생각을 중국말로 옮기려니, 마침 비슷해 보이는 말이 노자와 장자에게 있었어요. 바로 '무(無)'와 '유(有)', 없음과 있음이요. 게다가 노자 장자도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깊은 무언가를 자주 이야기했으니, 불교의 공과 결이 닮아 보였어요.
그래서 초기 학자들은 손쉽게 짝을 지었어요. "인도의 공? 아, 그거 노자가 말한 무랑 같은 거네!" 이렇게요. 이렇게 익숙한 말로 새 개념을 대충 맞춰 보는 걸 '격의', 그러니까 뜻을 맞춰 본다고 불러요. 스마트폰을 '작은 텔레비전'이라 부르는 것과 똑같아요. 처음 이해할 땐 도움이 되지만, 자꾸 그렇게 부르다 보면 진짜 뜻을 놓치게 돼요. 텔레비전이라 부르는 순간, 전화를 거는 기능은 슬쩍 가려져 버리잖아요.

승조가 빛나는 지점이 여기예요. 그도 노자 장자의 말을 빌려 썼어요. 그의 글이 아주 멋지고 신비로운 게 영락없는 장자 문체거든요. 하지만 그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어요. "공은 노자가 말한 그 '무'가 아니다."
승조는 이렇게 정리해요. 세상 것들은 진짜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짜로 '없는' 것도 아니다. 소용돌이를 다시 떠올리면 쉬워요. 있다고 하자니 알맹이가 없고, 없다고 하자니 눈앞에 멀쩡히 돌고 있잖아요. 그래서 그는 '참으로 있는 게 아니기에 공이라 부른다'고 말해요. 이게 그의 유명한 글 '부진공론'의 핵심이에요. 노자의 말을 입에 담되, 그 말이 원래 가리키던 자리를 슬쩍 옮겨, 인도 불교의 깊은 뜻 위에 새로 갖다 놓은 거죠. 단어는 빌렸지만 뜻은 빌리지 않은 셈이에요.

승조가 한 일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에요. 외국에서 온 어려운 생각을, 중국 사람이 자기 살갗처럼 느끼도록 자기 말로 새로 빚은 거예요. 덕분에 불교는 중국 땅에 잠깐 머무는 손님이 아니라, 뿌리를 내린 나무가 됐어요.
그가 서른 살 즈음 남긴 글들을 묶은 '조론'은 이후 천 년이 넘도록 중국 불교의 기둥 같은 책이 돼요. 특히 훗날 선불교를 비롯한 동아시아 사상이, 있음과 없음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그의 말법에 크게 빚지게 되고요. 짧게 살다 갔지만, 남긴 자국은 무척 길었어요.

승조는 인도 불교의 '공'을, 중국 사람에게 익숙한 노자와 장자의 말로 옮긴 사람이에요. 핵심은, 그가 익숙한 말을 빌리되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공을 노자의 '없음'과 똑같이 보지 않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자리로 한 걸음 더 밀고 갔어요. 소용돌이처럼, 분명 거기 있지만 단단한 알맹이는 없는 그 미묘한 상태요. 어려운 생각을 남의 말로 옮길 때 진짜 어려운 일은 단어를 바꾸는 게 아니라 그 속뜻을 잃지 않는 것이라는 걸, 승조는 1600년 전에 이미 보여 준 셈이에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