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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새 친구를 만나면 우리는 가장 먼저 이름을 물어요. 이름표를 받아 들고 나면 왠지 그 사람을 조금은 아는 것 같죠. 물건도 마찬가지예요. '이건 컵, 저건 의자, 저건 연필' 하고 이름을 하나씩 붙이면 어지럽던 세상이 착착 정돈되는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를 만나면 거의 자동으로 이름부터 찾아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름이 그 대상을 다 담지는 못해요. '사과'라는 두 글자를 아무리 노려봐도 새콤달콤한 맛은 한 방울도 나지 않잖아요. 친구 이름을 줄줄 외운다고 그 친구가 오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 아는 건 아니고요. 이름은 그저 손잡이일 뿐이고, 그 안에 든 진짜 내용은 늘 따로 있어요.
오늘 만날 사람은 바로 이 '이름과 진짜 사이의 틈'을 평생 파고든 사람이에요. 지금으로부터 1600년쯤 전, 중국에 살았던 승조라는 젊은 스님이죠.

승조는 서기 384년에 태어나 414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서른 살 남짓, 요즘으로 치면 한창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친 셈이에요.
집이 가난했던 그는 남의 책을 손으로 베껴 써 주는 일로 먹고살았어요. 인쇄기가 없던 시절이라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옮겨 적어야 했는데, 그 일 덕분에 남들보다 훨씬 많은 글을 읽게 됐죠. 처음에 그는 노자와 장자 같은 중국 옛 철학에 푹 빠졌어요. 깊고 멋졌지만, 어쩐지 가슴 한구석의 갈증이 가시지 않았대요. 그러다 우연히 불교 경전 하나를 읽고는 '내가 찾던 게 바로 이거다!' 하며 무릎을 쳤고, 곧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어요.
이후 그는 구마라집이라는 큰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어요. 멀리 중앙아시아에서 온 이 스승은 인도 불경을 중국어로 옮기던 당대 최고의 번역가였죠. 어려운 인도 말을 중국 사람이 알아듣게 바꾸는 작업장에서, 승조는 '공'이라는 가장 까다로운 개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제자로 이름을 날렸어요.

승조가 남긴 글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름 없는 열반'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런데 '열반'이라는 말부터 낯설죠?
열반은 원래 '타오르던 불을 후 불어서 끄다'라는 뜻에서 나왔어요. 활활 타던 불이 꺼지면 뜨거움도, 일렁임도, 연기도 사라지고 그 자리가 고요해지죠. 마음속에서 들끓던 괴로움과 욕심, 화의 불길이 완전히 가라앉아 더없이 평온해진 상태, 그 자리를 열반이라고 불러요.
여기서 많은 사람이 오해를 해요. 열반을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천국 같은 장소'나, 수행을 잘하면 상으로 받는 '대단한 물건'처럼 상상하는 거예요. 마치 어딘가에 도착하거나 무언가를 손에 쥐는 일로 여기는 거죠. 승조는 바로 이 오해를 풀어 주고 싶어 했어요.

승조의 대답은 이래요. 열반에는 붙일 이름이 없다고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쓰는 말은 늘 세상을 둘로 쪼개요. '있다'와 '없다', '크다'와 '작다', '여기'와 '저기'처럼요. 이름을 붙인다는 건 결국 '이건 이 칸, 저건 저 칸' 하고 금을 긋는 일이에요. 그런데 열반은 그 어느 칸에도 얌전히 들어가질 않아요. 있다고 하면 손에 잡히는 물건처럼 굳어 버리고, 없다고 하면 아무것도 아닌 텅 빈 허무가 되어 버리거든요. 열반은 그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에요.
마치 물맛을 설명하는 일과 비슷해요. 물을 단 한 번도 마셔 본 적 없는 사람에게 물맛을 말로 다 전할 수 있을까요? '달지도 짜지도 쓰지도 않고, 그냥…'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엔 직접 한 모금 마셔 봐야 알죠. 열반도 그래요. 말로 칸을 나눠 가리키려는 바로 그 순간, 정작 그 자리에서 비껴 나가 버려요. 그래서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오히려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이 생각의 뿌리에는 '공'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인도의 사상가 용수가 다듬은 생각인데, 세상 모든 것은 저 홀로 딱 정해진 알맹이를 품고 있는 게 아니라, 서로서로 기대어 잠시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이야기예요. 승조는 이 까다로운 인도 사상을 중국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말로 정성껏 옮겨 놓았어요. 그래서 그를 두고 인도의 지혜를 중국어 철학으로 번역해 낸 사람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승조가 말을 다 버리라고 한 건 아니에요. 그 자신도 결국 글을 써서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했으니까요.
아주 오래된 비유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이야기가 있어요. 누군가 '저기 달 좀 봐!' 하며 손가락을 들어 올리면, 우리는 손가락이 아니라 그 끝이 가리키는 달을 봐야 해요. 손가락만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정작 달은 놓치고 말죠. '열반'이라는 이름도 꼭 그런 손가락이에요. 그 말 자체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말이 가리키는 고요한 자리를 직접 향해 가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승조는 이름을 아예 지워 버리자고 한 게 아니라, 이름에 속지는 말자고 한 거예요. 이름표 너머에 있는 진짜를 보라는, 꽤 다정한 당부였던 셈이죠.

승조는 1600년 전, 서른 남짓의 짧은 생을 살다 간 중국의 젊은 스님이에요. 그는 마음의 괴로움이 다 가라앉은 평온한 자리인 열반을, 그 어떤 이름으로도 가둘 수 없다고 했어요. 우리의 말은 세상을 '있다, 없다'로 쪼개지만, 열반은 그 칸들 너머에 있으니까요. 물맛은 직접 마셔 봐야 알듯, 그 평온한 자리도 이름 너머에서 만나야 해요. 그러니 이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요긴하게 쓰되, 손가락만 보다가 달을 놓치지는 말자. 이것이 '이름 없는 열반'이 1600년을 건너 우리에게 건네는 한마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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