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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상상해 볼게요. 사람 하나 없는 외딴섬에 갓난아기가 있어요. 엄마도 아빠도 없고, 말을 가르쳐 줄 사람도, 글이 적힌 책 한 권도 없어요. 그런데 마침 새끼를 잃은 사슴 한 마리가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다가와 젖을 물려요. 아이는 그렇게 사슴 곁에서, 동물들 틈에서 자라기 시작해요.
이건 약 850년 전, 지금의 스페인 남부에 살던 한 철학자가 지어낸 이야기예요. 그 철학자의 이름은 이븐 투파일이고, 이 아이의 이름은 하이 이븐 야크잔이에요. 우리말로 풀면 깨어 있는 이의 아들, 살아 있는 자 정도 돼요. 이름부터 좀 수상하죠? 평범한 동화가 아니라는 신호예요.

처음엔 그냥 어린 짐승 같았어요. 배고프면 울고, 추우면 떨고요. 그런데 자라면서 자꾸 왜라는 물음이 생겨요. 어느 날 사슴 어미가 죽자 아이는 한참 슬퍼하다가 궁금해해요. 어제까지 따뜻하던 몸이 왜 차갑게 식었을까, 저 몸을 움직이게 하던 무언가는 어디로 갔을까. 답을 알려 줄 사람이 없으니 아이는 직접 어미의 몸을 살펴봐요. 말하자면 생애 첫 해부인 셈이죠.
이렇게 하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나씩 알아내요. 불을 처음 만나 그 쓸모를 익히고, 돌을 도구로 쓰고, 둘레의 동물과 식물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비슷한 것끼리 묶어 봐요. 우리가 학교에서 몇 년에 걸쳐 배우는 것들을, 이 아이는 오직 제 눈으로 보고 제 머리로 따져서 알아낸 거예요. 마치 처음 보는 기계를 설명서도 없이 이리저리 만져 보며 원리를 깨치는 사람처럼요. 이야기 속에서 하이는 이렇게 한 단계씩, 일곱 살 무렵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자라요.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갈게요. 이 섬도, 사슴도, 아이도 실제로 있었던 게 아니에요. 이븐 투파일이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사고실험이에요. 사고실험은 실험실도 도구도 없이 머리로만 해 보는 실험이에요. 만약에 이렇다면 어떻게 될까를 끝까지 차근차근 따라가 보는 거죠.
그가 던진 만약에는 이거예요. 만약 한 사람이 사회도, 종교도, 책도, 스승도 하나 없이 오직 자기 눈과 머리만 가지고 자란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깊은 진리에까지 혼자 힘으로 닿을 수 있을까? 조건을 이렇게 싹 덜어 낸 건, 사람이 본래 가진 맨눈과 맨머리의 힘만 또렷이 보려고 그런 거예요. 다른 사람이 미리 정답을 적어 둔 종이를 다 치워 버리고, 시험을 백지에서 다시 시작하게 한 셈이죠.

이야기 속 하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아요. 별이 천천히 도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모든 것이 늘 변하는데 그 변화 뒤에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러다 마침내, 이 모든 것을 있게 한 하나의 근원이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가닿아요. 신앙을 따로 배운 적도 없는 아이가 순전히 관찰과 추론만으로 그런 결론에 이른 거예요.
이븐 투파일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사람의 이성과 자연을 향한 관찰은, 누가 떠먹여 주지 않아도 가장 높은 진리까지 스스로 올라갈 힘이 있다는 거예요. 진리로 가는 길이 꼭 책이나 누군가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열리는 건 아니라고요.

이게 왜 그렇게 특별한 생각이었는지 잠깐 짚어 볼게요. 이븐 투파일이 살던 시대에는, 깊은 진리는 오직 거룩한 가르침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어요. 그런데 그는 정반대 자리에서 출발하는 인물을 한번 세워 본 거예요. 가르침을 단 한 줄도 받지 못한 아이를요.
그러니 이건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사람의 머리를 얼마나 믿어도 되는가를 묻는 진지한 실험이었어요. 가르침과 스스로 생각하기, 둘 중 무엇이 먼저냐를 두고 사람들이 오래 다투던 물음에, 이야기 한 편으로 답을 내놓은 거죠.

이야기 끝에 다른 섬에서 한 사람이 찾아와요. 그는 종교의 가르침을 책으로 배워 온 사람이에요. 둘은 서로의 말을 익히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깜짝 놀라요. 하이가 혼자 알아낸 진리와, 그 사람이 가르침으로 배운 내용이 결국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거든요. 출발한 길은 전혀 달랐는데 도착한 자리는 같았던 거예요.
둘은 사람들에게 이 깊은 이야기를 전하러 마을로 가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어려운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못해요. 결국 둘은 조용한 섬으로 다시 돌아가요. 이 마지막 장면은 조금 쓸쓸하지만, 진리를 스스로 깨닫는 일과 그걸 모두에게 전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라는 솔직한 고백이기도 해요.
이 이야기는 훗날 유럽까지 건너가요. 라틴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고,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사람의 이야기인 로빈슨 크루소에도 영향을 줬다고 보는 사람이 많아요.

하이 이븐 야크잔 이야기는 한 물음으로 묶을 수 있어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사람은 스스로 보고 생각해서 진리에 닿을 수 있을까? 이븐 투파일은 무인도의 아이라는 상상을 빌려 그렇다고 답했어요. 그리고 그 길의 끝이 가르침으로 배운 진리와 만난다고 보았죠. 우리가 무언가를 궁금해하고 혼자 따져 묻는 그 순간이, 사실은 850년 전 한 철학자가 가장 귀하게 여긴 인간의 힘이라는 걸 기억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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