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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서양인이 처음 만난 선의 얼굴은 사찰의 주지가 아니라 영어 원고를 붙잡은 평신도였어요.
오늘날로 치면 자격증 없는 통역자가 어느 날 한 분야의 세계 표준 해설자가 된 셈입니다.
그런데 그 통역자는 대충 아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절 안에서 오래 머물며, 절 밖의 언어로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이었죠.
스즈키 다이세쓰는 일본 가마쿠라의 엔가쿠지에서 수행했어요.
엔가쿠지는 일본 임제종을 대표하는 사찰입니다.
임제종은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는 선이 아니라, 스승이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으로 제자의 생각을 깨뜨리는 전통이에요.
1894년, 그는 다이세쓰라는 불교 이름을 받아요.
불교 이름은 새 출발의 이름입니다.
학교 졸업장이 아니라, “이 길을 계속 걸어가겠다”는 표시와 가까워요.
하지만 여기서 반전이 나옵니다.
스즈키는 정식 승려가 되지 않았어요.
또 스승의 법을 이어받는 절차도 밟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그는 사찰 조직 안에서 “공식 대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바로 그가 선을 설명하는 대표 얼굴이 됩니다.
“어? 승려가 아니었어?”라는 질문이 여기서 생겨요.
이 이상한 위치가 오히려 힘이 됐습니다.
스즈키는 절 안의 언어와 서양 독자의 언어 사이에 서 있었어요.
안에만 있으면 번역할 수 없고, 밖에만 있으면 속을 모릅니다.
선은 원래 말로 다 담기 어렵다고 말하는 전통이에요.
마치 음악을 악보만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스즈키는 그 말하기 어려운 것을 영어 문장으로 옮기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가 가진 것은 승려의 직함이 아니었어요.
대신 그는 두 세계를 동시에 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서양 독자에게 선은 처음부터 “절의 제도”가 아니라 “생각을 뒤집는 경험”처럼 다가왔어요.

선이 처음 서양으로 건너간 길은 향 냄새 나는 법당보다 잉크 냄새 나는 출판사에 가까웠어요.
산속 사찰의 수행법이 미국 중서부의 책상 위에서 영어 문장으로 바뀐 겁니다.
이 장면은 꽤 이상합니다.
조용한 절에서 태어난 말이, 일리노이주의 출판사에서 다시 태어난 거니까요.
1893년, 시카고에서 세계종교의회가 열렸어요.
세계 여러 종교의 대표들이 모여 자기 전통을 설명한 국제 회의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전 세계 종교가 한 무대에서 자기 언어로 발표한 거대한 콘퍼런스였죠.
그 뒤에 출판인 폴 카루스가 등장합니다.
카루스는 동양 사상을 영어권 독자에게 소개하려던 미국 출판인이에요.
그는 일본 선승 샤쿠 소엔에게 영어를 아는 제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스즈키가 1897년 미국 일리노이주 라살로 건너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번역과 편집 일을 해요.
수행자가 산문을 내려와 출판사 직원처럼 일하게 된 셈입니다.
이 장면을 회사로 바꾸면 더 또렷합니다.
외국 지사에 파견된 젊은 직원이 본사 매뉴얼을 새 언어로 다시 쓰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매뉴얼은 기계 설명서가 아니라, 마음을 다루는 오래된 전통입니다.
번역은 단어를 바꾸는 일이 아니에요.
“좌선”을 그냥 sitting meditation이라고 옮기면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좌선은 방석 위에 앉아 몸과 마음을 한곳에 모으는 수행이에요.
또 공안 같은 말도 문제입니다.
공안은 스승이 제자에게 던지는, 논리로 풀 수 없는 질문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시험 문제가 아니라, 머릿속 자동반응을 멈추게 하는 잠금화면 같은 겁니다.
스즈키는 이런 말을 영어로 건너가게 해야 했어요.
그는 단어를 옮긴 게 아니라, 낯선 경험이 서양 독자의 머릿속에서 작동하도록 문장을 고쳤습니다.
그래서 선의 서양행 티켓은 배표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티켓에는 원고지와 편집자의 빨간 펜도 함께 있었어요.

서양의 많은 독자는 방석에 앉기 전에 먼저 스즈키의 문장을 읽었어요.
선은 원래 “말보다 직접 경험”을 중시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에서 선을 퍼뜨린 것은 책과 강연이었어요.
요리를 먹기도 전에 레시피가 먼저 유행한 셈입니다.
스즈키의 『Essays in Zen Buddhism』은 1927년부터 나온 영어권 선불교 논문집이에요.
논문집이라는 말이 딱딱하게 들리지만, 역할은 분명했습니다.
선이라는 낯선 세계를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펼친 책이었어요.
또 『An Introduction to Zen Buddhism』은 1934년에 나온 입문서입니다.
입문서는 처음 들어오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는 책이에요.
스즈키는 그 문 앞에서 “선은 머리로 외우는 종교가 아니라, 보는 방식이 바뀌는 경험”이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서 있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집니다.
선은 설명을 의심하는 전통인데, 스즈키의 설명 덕분에 유명해졌어요.
말을 넘어가자는 가르침이 말로 퍼진 겁니다.
서양의 대학생들은 스즈키를 읽으며 동양의 이상한 수수께끼를 만났습니다.
예술가들은 거기서 형식 밖으로 튀어나가는 힘을 봤어요.
심리학자들은 마음이 자기 자신을 속이는 방식을 들여다보는 도구처럼 읽었습니다.
스즈키가 설명한 선은 조용한 취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는 방식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충격에 가까웠어요.
스마트폰 화면을 계속 닦다가, 사실 문제는 화면이 아니라 내가 쓰는 앱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서양의 선은 처음부터 수행장보다 서가에서 먼저 자랐습니다.
책장을 넘기던 독자는 아직 절에 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미 질문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선이 뭐지?”가 아니라, “내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기는 한가?”로요.
스즈키가 서양에 건넨 선은 전쟁이 끝난 뒤 더 어려운 질문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많은 서양 독자가 선을 자유와 평화의 언어처럼 읽었습니다.
복잡한 이론에서 벗어나는 길처럼 보였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누군가는 스즈키의 오래된 글을 다시 펼쳤습니다.
그 안에는 선, 무사도, 일본 문화가 함께 설명되는 대목들이 있었어요.
무사도는 일본의 전사 계층이 이상으로 삼았던 태도와 윤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싸움과 죽음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멋있고 엄숙한 언어로 정리한 전통이에요.
스즈키의 『Zen and Japanese Culture』는 선과 일본 문화를 연결해 설명한 책입니다.
이 책은 서양 독자에게 선이 일본 예술과 생활 속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보여줬어요.
하지만 바로 그 연결이 나중에는 질문이 됩니다.
“선이 일본 문화를 설명하는 언어라면, 전쟁의 일본과는 어디까지 얽혀 있었나?”
이 질문은 가볍지 않습니다.
존경하던 선생님의 오래된 글에서 불편한 문장을 발견한 느낌과 비슷해요.
그 순간 독자는 책을 덮지 못하고, 오히려 더 천천히 읽게 됩니다.
스즈키의 전시기 글을 둘러싼 논쟁은 그래서 이어졌습니다.
그가 선을 군국주의와 어떻게 연결했는지, 또는 얼마나 거리를 두었는지 묻는 논쟁이에요.
군국주의는 나라가 전쟁과 군대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생각과 분위기를 말합니다.
여기서 스즈키는 단순한 영웅도, 단순한 악역도 아니게 됩니다.
그는 선을 영어로 건너가게 만든 사람이었어요.
동시에 그 선이 어떤 역사 속에서 말해졌는지 묻는 질문을 남긴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즈키를 읽는 일은 한 사람을 기념하는 일로 끝나지 않아요.
그가 옮긴 문장이 누구에게 희망이 됐는지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장이 어떤 시대의 그림자를 함께 데려왔는지도 봐야 해요.
선은 말로 다 담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즈키의 삶은 말이 얼마나 멀리 가는지도 보여줍니다.
그 말이 바다를 건너간 뒤, 우리는 어디까지 함께 건너온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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