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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니시타니 게이지에게 허무는 피해야 할 병이 아니라, 끝까지 들어가야 할 문이에요.
보통 우리는 의미가 사라지는 순간을 빨리 덮으려 해요.
친구를 만나고, 영상을 틀고, 일을 더 잡아요.
속에서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말이 올라오면, 얼른 다른 소리로 묻어버리죠.
그런데 니시타니는 반대로 가요.
그는 『종교란 무엇인가』에서 허무를 위로로 봉합하지 않아요.
이 책은 훗날 영어권에서 『Religion and Nothingness』로 알려진 그의 대표 저작이에요.
여기서 허무는 단순히 우울한 기분이 아니에요.
내가 붙잡던 의미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경험이에요.
오늘로 치면, 평생 열심히 키운 계정이 한순간에 삭제됐는데 백업도 없는 느낌에 가까워요.
니시타니가 무서운 이유는 여기에 있어요.
그는 독자에게 “괜찮아, 다 잘될 거야”라고 말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질문을 끝까지 봐야 해”라고 밀어 넣는 쪽에 가까워요.
그래서 그의 철학은 따뜻한 담요가 아니에요.
한밤중에 불을 켜고 빈방을 똑바로 보게 만드는 손전등이에요.
그 빈방이 무섭다고 눈을 감으면, 니시타니가 묻는 질문은 시작도 못 해요.

그가 독일에서 배운 것은 서양 철학의 답이 아니라, 서양이 끝내 풀지 못한 질문이었어요.
니시타니는 1937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로 유학을 가요.
프라이부르크는 당시 하이데거가 강의하던 독일의 대학 도시예요.
하이데거는 인간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깊이 파고든 철학자로 알려져 있어요.
거기서 니시타니는 니체의 문제와 정면으로 만나요.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예요.
이 말은 하늘에 사는 누군가가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던 절대 기준이 더는 예전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이게 바로 니힐리즘이에요.
니힐리즘은 세상에 확실한 의미도, 절대적인 기준도 없다고 느끼는 상태예요.
오늘로 치면 내비게이션이 갑자기 꺼졌는데, 목적지도 주소도 사라진 상황과 비슷해요.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생겨요.
동양에서 온 철학자가 서양의 허무를 배우고,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아요.
오히려 그 질문을 들고 불교의 공으로 돌아와요.
마치 외국어를 배우러 떠난 사람이 자기 집 문패를 처음 읽게 된 것과 같아요.
멀리 가서야 가까운 것이 보인 거예요.
그래서 니시타니에게 독일 유학은 답안지를 받은 시간이 아니에요.
그 시간은 질문을 더 날카롭게 만든 시간이죠.
“의미가 무너진 뒤에도,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그 질문이 그의 철학 안에서 계속 살아 움직여요.
니시타니 게이지의 철학은 책상 위에서만 시험받지 않았어요.
그의 이름은 교토학파라는 흐름 안에 남아 있어요.
교토학파는 니시다 기타로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서양 철학과 불교 사유를 함께 붙들려 한 현대철학의 흐름이에요.
쉽게 말하면, 일본 지식인들이 “서양의 철학 언어로 동양의 깊은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모인 장면이에요.
하지만 이 이름은 조용한 연구실에만 있지 않아요.
전시 일본 지식인들이 참여한 좌담과 논의 속에도 니시타니의 이름이 남아요.
그 기록은 훗날 논쟁의 대상이 돼요.
여기서 불편한 지점이 생겨요.
허무와 종교를 말한 철학자의 이름이, 국가와 전쟁의 언어 속에도 등장하는 거예요.
한 사람이 평생 쓴 깊은 글보다 한 시대의 공개 발언이 더 오래 따라붙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 셈이에요.
그래서 니시타니를 읽는 일은 단순히 “깊은 철학자였구나”에서 멈추기 어려워요.
그의 사유는 빛만 가진 물건이 아니에요.
빛을 세게 비출수록 그림자도 함께 선명해지는 물건에 가까워요.
이 점이 오히려 그를 더 현실적인 인물로 만들어요.
철학은 깨끗한 유리관 속에서만 자라지 않거든요.
시대의 소음, 국가의 말, 전쟁의 압력 속에서도 사람이 어떤 언어를 골랐는지가 남아요.

그가 말한 공은 세상을 비우는 말이 아니라, 허무가 막아 둔 시야를 여는 말이에요.
공은 “모든 것이 고정된 자기만의 본질을 갖지 않는다”는 생각이에요.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세상 모든 것은 혼자 딱딱하게 서 있는 블록이 아니라 서로 기대어 생기는 관계라는 뜻이에요.
오늘로 치면 사진 한 장도 빛, 카메라, 손, 기억, 그날의 기분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라는 거예요.
허무는 말해요.
“아무 의미도 없어.”
그러면 우리는 모든 것이 꺼진 화면처럼 느껴져요.
그런데 공은 같은 자리를 다르게 보게 해요.
“아무것도 고정돼 있지 않다.”
이 말은 끝장이 아니라, 다시 볼 수 있다는 신호가 돼요.
붙잡고 있던 답이 무너질 때 사람은 보통 겁을 먹어요.
직장, 관계, 믿음, 자존심 같은 것들이 나를 지탱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그것들이 절대적인 기둥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이상하게도 다른 길이 열려요.
니시타니에게 허무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에요.
그 골목 끝에서 벽이라고 믿었던 것을 다시 만져보는 일이에요.
알고 보니 문일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공은 “아무것도 없다”가 아니에요.
“내가 붙잡은 방식으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에 가까워요.
허무가 세상을 검게 칠한다면, 공은 검은색마저도 고정된 색이 아니라고 보여줘요.
니시타니가 우리에게 남기는 장면은 이상하게 조용해요.
누군가 절망의 끝에서 큰 답을 외치는 장면이 아니에요.
빈 페이지 앞에 앉아, 처음으로 빈 페이지를 도망치지 않고 보는 사람의 모습에 가까워요.
그 페이지가 정말 비어 있다면, 거기에 무엇이 나타날 수 있을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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