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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864년, 시골에 묻혀 살던 일흔셋의 학자가 왕의 측근직을 며칠 만에 거절하고 산으로 돌아갔다.
흥선대원군이 직접 제안한 자리였다. 동부승지, 왕의 핵심 비서로 권력의 심장부에 붙은 직책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재야에 사는 노인에게 나라 최고 권력자가 직접 전화를 걸어 임원직을 청한 셈이다. 조선 양반에게 이보다 더한 영광은 없었다.
그런데 이항로는 거절했다. 며칠도 버티지 않고 사직 상소를 올린 뒤 경기도 양평 벽계의 거처로 발길을 돌렸다.
겸손해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따로 있었고, 그 '것'이 무엇인지는 이후의 삶이 증명한다.

조선 말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은 한양이 아닌 양평의 한 골짜기에서 자라났다.
이항로의 호가 화서(華西), 그의 학파를 화서학파라 부른다. 출발은 벽계에 자리 잡은 작은 서당이었다.
그 서당에서 나온 제자들이 걸출했다. 김평묵, 유중교, 그리고 훗날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 엎드린 최익현이 모두 이항로의 문하에서 배웠다.
이항로의 핵심 가르침은 주리론(主理論)이었다. 쉽게 말하면 "이 세상의 근본은 도덕의 원리, '이(理)'다"라는 입장이다. 오늘날로 치면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결국 윤리가 세상을 규정한다"는 결기에 가깝다.
그는 17세기 조선 성리학의 거목 송시열의 정통을 잇는다고 자부했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 성리학을 주도한 학자로, 그 정통 계승을 선언한다는 건 조선 학문 세계에서 최고 권위를 자처하는 행위였다.
지방 소도시의 작은 서당이 알고 보니 한 나라의 저항 운동 지도자들을 길러낸 요람이었다. 어느 지방 학원이 훗날 국회를 절반 채우는 인물들의 모교가 된 격이다.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상륙한 그해, 일흔다섯의 노학자는 마지막으로 붓을 들었다.
1866년, 병인양요가 터졌다.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으로, 서양 세력이 실제로 조선 땅을 밟은 충격적인 순간이었다.
평소 정치 발언을 삼가던 이항로였다. 대원군의 벼슬도 거절한 그가, 이 사건에는 붓을 들었다.
상소의 핵심은 한 줄이었다. "서양 문물과 천주교를 받아들이면 조선의 도(道)가 무너진다. 끝까지 싸워야 한다."
이것이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시작이다.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고 서양과 일본의 침투를 막겠다는 선언이었다.
평생 가장 격렬한 정치적 목소리를 낸 게 죽기 불과 2년 전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제자들에게 넘어가 전혀 다른 형태로 폭발한다.

이항로가 죽고 30년 뒤, 그의 제자들은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 엎드리거나 산속에서 의병을 모았다.
제자 최익현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에 맞서 지부상소(持斧疏)를 올렸다. '지부'는 도끼를 들었다는 뜻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올린 결사 반대의 표현이었다.
또 다른 제자 유인석은 1895년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된 사건 이후 직접 의병을 일으켰다. 시골 서당의 강의가 한 세대 만에 무장 봉기의 깃발이 된 것이다.
화서학파의 위정척사 사상은 조선 말 의병 운동 전체의 사상적 뿌리가 됐다. 이항로가 양평 골짜기에서 심은 씨앗이 나라 전체로 퍼진 결과였다.
결국 이들은 역사에서 졌다. 조선은 문을 열었고, 끝내 나라를 잃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것이 낡은 질서였는지, 아니면 그 안에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었는지는 지금도 답이 하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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