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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우주의 원리에 이름을 붙인 사람이 그 발견을 자기 공으로 돌리는 일은 흔하지 않아요.
정호는 그렇게 했습니다.
정호는 11세기 중국 북송의 학자로, 동아시아 철학의 역사를 바꾼 인물이에요.
그는 만년에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천리 두 글자만큼은 내가 스스로 체득해 낸 것이야."
천리란 하늘의 이치, 즉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 법칙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중력'처럼, 인간이 발명한 게 아니라 원래 거기 있었던 진리를 가리키는 개념이죠.
그런데 정호는 그 진리에 이름을 붙인 사람이 자기라고, 공공연히 선언합니다.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후 역사가 그 선언을 증명해줬습니다.
천리 개념은 조선과 중국 사대부 500년의 정치이론과 우주관을 떠받치는 토대가 돼요.

정호에게 악인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감각이 죽은 사람이었어요.
정호는 「식인편(識仁篇)」에서 한의학 용어를 끌어왔어요.
식인편은 '인(仁)을 깨닫는 법을 서술한 글'로, 그가 남긴 가장 핵심적인 텍스트 중 하나예요.
그는 거기에 이렇게 씁니다.
"의서에서 손발이 마비된 것을 불인(不仁)이라 하는데, 이 이름이 가장 잘 들어맞는다."
인(仁)은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보통 '어진 마음'이나 '사랑'으로 풀이돼요.
그런데 정호는 그 정의를 뒤집었습니다.
그에게 인이란 '마음이 착하다'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느끼는 감각 능력'이에요.
잠을 잘못 자서 팔이 저려본 적 있죠?
그 팔은 분명히 내 팔인데, 찌르거나 꼬집어도 별로 아프지 않아요.
정호가 말한 비도덕이란, 타인의 고통이 바로 그 저린 팔처럼 느껴지는 상태예요.
그래서 그의 철학에서 도덕적 수양은 윤리 규칙을 암기하는 게 아니에요.
타인과 세계를 향한 감각을 살아있게 유지하는 훈련이죠.
이 발상은 당시로선 굉장히 이단적이었습니다.

정호가 권력을 잃은 그 자리에서, 그를 쫓아낸 왕조보다 오래 살아남을 학문이 시작되고 있었어요.
1070년경, 정호는 황제 신종(神宗) 밑에서 어사(御史)로 일하고 있었어요.
어사는 오늘날로 치면 감사원 혹은 검찰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관리들을 감찰하는 역할이에요.
그런데 당시 재상 왕안석(王安石)이 신법(新法)이라는 대개혁을 밀어붙이고 있었습니다.
신법은 토지세 개편, 농민 대출 제도, 병역 개혁을 포괄하는 국가 전면 재편 프로그램이었어요.
왕안석은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않았고, 정호는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결국 졌어요.
정호는 지방으로 좌천됐고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납니다.
정치적으로는 완전한 패배였어요.
하지만 그 공백의 시간이 전혀 다른 방향에서 역사를 바꿉니다.
권력에서 밀려난 정호는 제자들을 모아 도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회사 구조조정에서 밀려난 사람이 시간이 남아 쓴 메모가, 한 세대 뒤 그 회사의 경영지침이 되는 상황이랑 비슷하죠.
정호가 지방에서 가르친 사상은 훗날 주자(朱子)를 거쳐 조선 사대부의 국가운영 원리가 됩니다.
정쟁에서 진 사람이, 그를 쫓아낸 왕조보다 500년 더 살아남은 셈이에요.
두 형제가 같은 책상에서 같은 책을 읽고 자랐어요. 그리고 그들이 갈라진 자리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전체가 갈라졌습니다.
정호에게는 동생 정이(程頤)가 있었어요.
두 사람은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고, 같은 스승 주돈이(周敦頤)에게 배웠습니다.
주돈이는 북송의 철학자로, 짧은 글 하나로 이후 성리학 전체의 우주론적 기초를 닦은 인물이에요.
그런데 형제는 결정적인 지점에서 갈라집니다.
정호는 마음(心)과 천리가 하나라고 봤고, 수양이란 그 합일을 '느끼는' 것이라 했어요.
정이는 사물의 이치를 하나씩 궁구하는 격물(格物), 즉 탐구를 통한 지식의 축적을 강조했습니다.
격물은 오늘날로 치면 과학적 탐구에 가까운 개념이에요.
만물에 각각의 이치가 있고, 그것을 하나하나 파악하면 결국 보편적 진리에 닿는다는 생각이죠.
정호의 방식이 직관과 감각이라면, 정이의 방식은 분석과 축적이었습니다.
이 갈림길은 이후 동아시아 사상의 두 줄기로 이어져요.
정호의 길은 육상산을 거쳐 왕양명(王陽明)의 심학(心學)으로 흘렀습니다.
심학이란 '마음 바깥에 따로 이치가 없다'는 사상으로, 도덕의 근거를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찾아요.
정이의 길은 주자(朱熹)의 성리학으로 이어져 조선 500년을 지배합니다.
한 가정에서 자란 두 형제가 동아시아 사상계 전체를 양분한 셈이에요.
그런데 두 사람은 평생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이정(二程)'으로 불렸어요.
갈라지면서도 갈라지지 않았던 그 관계.
그것이 두 사상이 각각의 깊이를 잃지 않은 이유였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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