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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열자가 굶어 죽기 직전, 정나라 재상이 보낸 쌀가마를 그대로 돌려보냈어.
열자는 약 2400년 전 중국 전국시대를 산 도가 철학자야.
도가란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삶을 추구하는 사상이야.
노자와 장자가 그 대표 인물이고, 열자는 그 계보에서 잊히다시피 한 이름이지만 그가 남긴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강렬해.
재상 자양(子陽)이 굶주린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냈어.
열자는 두 번 절을 하고 받지 않았어.
심부름꾼이 돌아가자 아내가 울며 따졌어.
"당신 같은 현자도 이 꼴이에요? 그냥 받아요!"
열자의 대답은 짧았어.
"임금이 직접 나를 알아봐서 보낸 게 아니야.
남의 말을 듣고 보낸 거잖아.
그 사람이 또 다른 말을 들으면, 그땐 죄를 내릴 수도 있어."
얼마 뒤 자양은 민란에 살해됐어.
그의 측근들도 함께 죽었어.
하지만 열자는 화를 면했어.
무위(無爲)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아.
무위란 자연의 흐름을 억지로 거스르지 않는 것, 끌어당기지 않는 것이야.
오늘날로 치면 회사 임원이 갑자기 보내온 거액의 격려금을 "이 호의 뒤에 따라올 통제까지 계산해서" 거절하는 결단에 가까워.
그 쌀가마엔 쌀만 있는 게 아니었어.
용한 점쟁이가 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도망쳤어.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
열자는 한때 정나라에서 신들린 점술로 유명한 계함(季咸)에게 완전히 매료됐어.
그의 말이 너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니, 스승 호자(壺子)보다 계함이 더 대단해 보일 정도였어.
호자는 도가의 깊은 경지를 가르치던 열자의 스승이야.
결국 열자는 스승에게 고백했어.
"솔직히 선생님의 도보다 저 사람의 술수가 더 높다고 생각했어요."
호자는 화내지 않았어.
오히려 계함을 불러 자신의 얼굴을 보게 했어.
첫 번째 만남 뒤, 계함이 열자에게 말했어.
"당신 스승은 곧 죽겠어요. 열흘도 못 버텨요."
열자가 울며 호자에게 전했더니, 호자가 웃으며 말했어.
"오늘 나는 대지처럼 고요한 모습을 보여줬어. 다시 데려와."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함이 올 때마다 호자의 얼굴빛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어.
살아있는 것 같다가, 죽어가는 것 같다가, 텅 빈 것 같다가, 모든 형태를 다 품은 것 같다가.
네 번째 만남에서 계함은 그냥 달아났어.
점술이 통하려면 전제가 있어.
'이 사람은 지금 이런 상태다'를 읽을 수 있어야 해.
그런데 고정된 자아가 없는 사람 앞에서는 그 전제 자체가 무너져.
마치 면접관이 지원자의 표정을 분석하려는데, 그 지원자가 만날 때마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들어오는 상황이야.
평가 기준 자체가 사라지는 거지.
이 사건 이후 열자는 3년간 집에 틀어박혔어.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 먹이를 사람 음식처럼 정성껏 챙겼어.
가장 높은 경지로 올라가는 대신, 삶의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간 거야.

우공이산도, 기우도, 조삼모사도, 우리가 매일 쓰는 이 사자성어들이 모두 한 사람의 책에서 나왔어.
우공이산(愚公移山)은 90세 노인이 집 앞을 가로막은 두 개의 산을 파내겠다고 결심하는 이야기야.
"자손 대대로 파내다 보면 언젠가는 없어진다"는 그 결심이야.
결국 하늘이 감동해 신을 보내 산을 치워줬어.
기우(杞憂)는 기(杞)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하다 먹지도 자지도 못한 이야기야.
오늘날 쓸데없는 걱정을 가리키는 말이야.
조삼모사(朝三暮四)는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주겠다고 했다가 화내자, '아침 넷 저녁 셋'으로 바꿔 달랬다는 이야기야.
총량은 같은데 순서만 바꿔서 상대를 조종하는 상황을 비유해.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어.
열자는 도가 철학자야.
도가의 핵심은 '억지로 하지 마라, 자연의 흐름에 맡겨라'야.
근데 가장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미련하게 산을 파는 90세 노인'이잖아.
무위와 정반대야.
열자는 이 모순을 해결하려 하지 않았어.
운명에 순응하는 사람과 운명에 맞서는 사람을 둘 다 진지하게 다뤘어.
오늘날 자기계발서가 '하면 된다'와 '내려놓아라'를 동시에 외치는 것처럼, 열자는 그 두 입장을 함께 품었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
하지만 어쩌면 그게 더 정직한 거야.
세상이 한 가지 방향으로만 움직인 적이 없으니까.
열자가 죽은 뒤, 그의 책은 500년 동안 사라졌어.
다시 나타났을 때, 그것이 정말 같은 책인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어.
한나라 때 만든 도서 목록 『한서 예문지(漢書 藝文志)』에는 분명히 적혀 있어.
"『열자』 8편."
하지만 그 뒤 책은 자취를 감췄어.
그러다 위진(魏晉) 시대, 4세기 무렵 학자 장담(張湛)이 나타났어.
"집안 여기저기 흩어진 단편들을 모아 엮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것이 지금 우리가 읽는 『열자』야.
근데 여기서 문제가 생겨.
장담이 살던 시대는 불교가 중국에 막 퍼지던 때야.
현존 『열자』에는 도가 사상 곁에 불교적 개념이 슬쩍 섞여 있어.
그래서 학계는 천 년 넘게 다투고 있어.
"이 책이 원본인가, 아니면 장담이 자기 생각을 섞어 다시 쓴 위서(僞書)인가?"
위서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후대에 쓴 가짜 책이야.
아직 결론이 없어.
어떤 작가의 원고가 통째로 사라졌는데, 500년 뒤 다른 사람이 "내가 기억해서 복원했다"며 책으로 펴낸다면?
그걸 원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여기서 진짜 아이러니가 있어.
"운명에 맡겨라, 어차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없어"라고 가르친 그 책이, 정작 자기 운명을 한 번 잃어버렸다가 다른 사람 손에서 부활했어.
진짜인지 가짜인지 여전히 알 수 없는 그 책 안에서, 우공이산과 기우와 조삼모사는 지금 이 순간도 살아 돌아다니고 있어.
그 이야기들이 열자의 것인지 장담의 것인지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지금 당신 입에서 나오는 건, 아무도 부정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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