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주돈이(1017~1073)는 죽을 때까지 지방 군청을 벗어나지 못한 하급 관리였다.
분녕현주부, 남안군사리참군, 오늘날로 치면 군청 담당 공무원 수준의 직책만 전전하다 5품 문턱을 끝내 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지금 동아시아에서 유교 철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이름을 가장 먼저 접는다.
그는 생전에 글 두 편을 남겼다.
하나는 태극도설(太極圖說), 다른 하나는 통서(通書).
태극도설은 우주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통서는 그 우주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룬 글이다.
생전에는 거의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가 죽은 지 100년쯤 지났을 때, 한 사람이 그 글을 다시 펼쳐 들고 이렇게 선언했다.
"이분이 시작이야."
그 한마디로, 무명의 지방관이 동아시아 유학 700년의 시조가 됐다.

유교 우주론의 출발을 알린 태극도에 불편한 비밀이 하나 있다.
태극도의 원형이 도교에서 왔다는 주장이다.
도교는 당시 유교 지식인들이 "미신에 가깝다"며 가장 배척하던 사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도교의 도식에서, 유교 최대의 우주론이 시작됐다는 얘기다.
진단(陳摶)은 송나라 초기에 이름을 날린 도교 도사다.
그가 그린 무극도(無極圖)는 신선이 되기 위한 몸 수련, 이른바 내단 수행의 핵심 도식이다.
청나라 학자 황종염과 모기령은 주돈이의 태극도와 진단의 무극도를 나란히 놓고 따졌다.
결론은 단호했다. "거의 똑같다."
원형인 무극도는 아래서 위로 올라가는 구조다.
수련자가 단계를 밟아 무극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린 도식이다.
주돈이는 그걸 거꾸로 뒤집었다.
위에서 아래로, 우주가 처음 생겨나는 방향으로.
방향 하나를 바꿔서 도교의 수련도를 유교의 우주 생성론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태극도설 전문의 글자 수는 단 249자다.
트위터 두 개를 합친 분량이다.
그런데 이 한 페이지가 이후 700년 동안 중국·조선·일본 모든 지식인의 필수 교양이 됐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이라면 반드시 꿰고 있어야 했다.
첫 문장부터 심상치 않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풀이하면 "끝이 없는 것, 그것이 곧 태극이다"라는 뜻이다.
우주의 근원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무극)가 있는데, 그게 동시에 모든 것의 시작(태극)이기도 하다는 주장이다.
비유하면 이렇다.
컴퓨터를 끄면 화면은 텅 비어 있다.
하지만 그 꺼진 상태 안에 이미 운영체제 전체가 잠재돼 있다.
거기서 글은 멈추지 않는다.
태극이 음(陰)과 양(陽)을 낳고, 음양이 오행(五行), 즉 목·화·토·금·수를 낳고, 오행이 만물을 낳고, 그 만물에서 인간이 나온다.
우주의 탄생부터 인간 윤리의 근거까지, 249자 안에 전부 압축됐다.
당시 유교 지식인들의 가장 큰 고민은 "왜 인간은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였다.
불교와 도교가 각자의 답을 내놓는 동안, 주돈이는 우주의 구조 자체에서 그 근거를 끌어냈다.

시조는 본인이 만드는 게 아니다.
100년 뒤의 누군가가 만들어준다.
주돈이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였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그 사상을 이어받았다.
두 사람은 송나라 신유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세상 모든 것을 원리(이, 理)와 물질적 힘(기, 氣)으로 설명하는 틀인 이기론(理氣論)을 발전시켰다.
그다음 세대에 주자(朱熹)가 등장했다.
주자는 공자 이후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남긴 유학자로, 송나라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그가 한 일은 계보를 그리는 것이었다.
주돈이에서 정호·정이를 거쳐 자신에 이르는 흐름을 "도학(道學)"이라는 이름의 정통 계보로 공식화했다.
그리고 주돈이를 그 계보의 맨 앞에 세웠다.
정작 주돈이 본인은 자신이 무슨 학파의 시조가 될지 전혀 모른 채 지방관으로 생을 마쳤다.
이름을 날리지도 못했고, 제자도 많지 않았다.
그저 짧은 글 몇 편을 남겼을 뿐이다.
죽은 뒤 100년이 지나서야 시대를 규정하는 사상의 출발점이 됐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아직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생각들이 어딘가에 조용히 잠들어 있지 않을까.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2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