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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장재가 들고 간 것은 정벌 계획서였다.
범중엄이 돌려준 것은 책 한 권이었다.
1040년, 스물한 살의 장재(張載)는 송나라 서쪽 적국 서하(西夏) 정벌 계획서를 손에 쥐고 당대 최고 권력자를 찾아갔다.
그 권력자가 바로 범중엄(范仲淹)이었다.
"천하의 걱정은 남보다 먼저, 즐거움은 남보다 나중에"라는 말로 유명한 명재상이자 「악양루기」를 쓴 문인이었다.
범중엄은 계획서를 꼼꼼히 읽었다.
그러고는 돌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군인이 아니라 사상가입니다. 이것부터 읽어보세요."
건네준 것은 유가 경전 『중용(中庸)』 한 권이었다.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우주의 질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논한 고전이다.
의대 입시를 준비하던 학생이 면접관에게 "너는 시인이 될 사람"이라며 시집을 받은 격이었다.
장재는 그 책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이후 10여 년, 그는 칼 대신 붓을 잡는다.

불교는 만물이 비어 있다고 했다.
장재는 정반대로 답했다.
비어 있는 그 자리조차 가득 차 있다고.
『중용』을 받은 뒤 장재는 10여 년간 불교와 도교를 깊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둘 다 뭔가 부족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그는 유학으로 돌아와 스스로 답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답이 태허즉기(太虛即氣)다.
풀어 쓰면 "텅 빈 허공조차 사실은 기(氣)로 가득 차 있다"는 주장이다.
기(氣)란 세상 모든 것을 구성하는 근원적인 에너지이자 물질,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우주를 이루는 기본 재료'라고 보면 된다.
불교에서는 '만물은 본디 비어 있다'는 공(空)을 가르쳤다.
장재는 그것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공간도, 실은 기가 응축되거나 흩어진 상태일 뿐이야."
현대 양자물리학자들이 '진공이라 부르는 공간에도 입자가 끊임없이 생겨났다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과 묘하게 닮아 있다.
이 주장에서 장재의 철학 전체가 펼쳐진다.
기가 모이면 사람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죽음이다. 삶과 죽음은 기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그는 이것을 기일원론(氣一元論), 즉 '기 하나로 우주 만물을 설명한다'는 체계로 정리했다.
신도 아니고, 텅 빈 무(無)도 아니고, 오직 기 하나가 모든 것을 이룬다는 선언이었다.
이 선언 하나가 이후 동아시아 철학 지형 전체를 흔든다.
장재가 서재 벽에 걸어둔 짧은 글의 첫 줄은 황제와 거지가 한 핏줄이라는 선언이었다.
그는 서재 서쪽 벽에 손수 쓴 글 한 편을 걸어두었다.
「서명(西銘)」, 서쪽 벽에 걸린 명문(銘)이라는 뜻이다.
그 첫 줄은 이렇다. "하늘은 나의 아버지, 땅은 나의 어머니, 모든 백성은 나의 형제,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다."
이게 왜 파격이었을까.
당시 송나라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
황제는 천자(天子), 즉 하늘의 아들이라 불리며 백성과는 다른 존재로 여겨졌다.
그런데 장재는 '하늘이 내 아버지라면, 황제도 나도 같은 형제'라고 쓴 셈이었다.
21세기 사람이 거실 벽에 '전 인류는 한 가족'이라는 선언서를 액자로 걸어둔 것과 같다.
단, 그 액자 때문에 잡혀갈 수도 있는 시대에.
이 글이 가능했던 것도 태허즉기 덕분이었다.
모든 것이 기로 이루어져 있다면, 황제도 거지도 결국 같은 기에서 나온 존재다.
우주의 재료가 하나이니 만물은 한 몸이라는, 논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후일 그의 외조카인 정자(程子), 즉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는 「서명」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두 사람은 유학의 핵심 개념인 '성즉리(性卽理)', 즉 인간의 본성이 곧 우주의 이치라는 사상을 완성한 성리학의 핵심 사상가들이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단 한 줄이었다. "맹자 이래 이런 글은 없었다."
장재의 관을 짤 돈은 제자들이 모았다.
그가 남긴 네 문장은 그 후 천 년 동안 인용됐다.
1077년, 장재는 조정의 부름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런데 그 길 위, 여관 한 칸에서 숨을 거뒀다.
시신을 수습할 돈조차 없어 제자들이 돈을 추렴해 장례를 치렀다.
평생 벼슬을 탐하지 않았고 재산을 쌓지 않았다.
통장 잔고는 0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네 문장을 남겨두었다.
횡거사구(橫渠四句), 그가 살았던 횡거(橫渠) 마을 이름을 딴 네 구절짜리 선언이다.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백성을 위해 명(命)을 세우고,
옛 성인을 위해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연다."
한 줄씩 풀면 이렇다.
우주와 자연이 말하지 못하는 진리를 사람의 언어로 드러내고, 백성이 삶의 의미를 찾도록 이끌고, 선인들의 지혜가 끊기지 않게 연결하고, 후대 사람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
한 문장씩이 하나의 지식인 선언이었다.
스물한 살에 정벌 계획서를 들고 재상을 찾아갔던 청년은 결국 칼 대신 네 문장으로 세상에 기여하려 했다.
그 문장은 이후 천 년 넘게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서재 벽에 걸렸다.
어쩌면 장재는, 범중엄이 건네준 책 한 권의 의미를 죽는 순간에야 완전히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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