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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한 승려가 혼자서 한 학파 전체의 교리를 책 한 권으로 정리한 일이 있어요.
4~5세기 무렵 현재 파키스탄 페샤와르 일대인 간다라 지역에서 태어난 승려 바수반두, 한자 이름으로는 세친(世親)이라 불리는 인물이에요.
당시 인도 불교의 주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는 학파였어요.
설일체유부는 "세상을 이루는 모든 기본 요소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학파예요.
오늘날로 치면, 물리학자가 원자와 소립자가 진짜 실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마음과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들이 모두 실재한다고 본 거예요.
세친은 이 학파의 교리를 600개의 게송으로 압축하고 방대한 주석을 붙여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을 완성했어요.
줄여서 『구사론』이라고 해요.
이후 동아시아 불교 전역에서 "구사론을 모르면 불교를 모른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이 책은 표준 교과서가 됐어요.
그런데 세친은 나중에 자신이 집대성한 그 학파를 완전히 등지게 돼요.
형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에 달려갔더니, 알고 보니 형은 멀쩡했어요.
세친의 친형 아상가(무착, 無着)는 이미 대승불교의 거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어요.
대승불교는 "나 혼자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함께 구원하겠다"는 넓은 이상을 내건 불교의 한 흐름이에요.
세친이 평생을 바친 부파불교와는 방향이 달랐어요.
그래서 세친은 줄곧 대승을 "그건 부처가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야"라며 공격하고 다녔어요.
두 형제가 불교 안에서 서로 다른 진영에 선 셈이었어요.
그러자 무착은 자신이 위독하다는 거짓 전갈을 동생에게 보냈어요.
세친이 침상 곁으로 달려오자, 무착은 직접 대승의 핵심 경전을 읽어줬어요.
형이 동생의 사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연출한 거예요.
한 가족 안에서 인도 불교의 두 거대한 흐름이 충돌하고 화해한 순간이었어요.
경전을 다 들은 세친은 칼을 꺼내 자신의 혀를 잘라버리겠다고 했어요.
평생 대승을 헐뜯어온 그 혀로 지은 죄를 속죄하려 한 거예요.
무착은 동생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어요.
"혀를 잘라도 죄가 없어지지는 않아. 그동안 헐뜯은 만큼, 그 혀로 대승을 찬탄하면 돼."
오늘날로 비유하면 이런 상황이에요.
평생 "A 이론은 틀렸다"는 논문을 써온 학자가 어느 날 자신이 틀렸음을 깨달았어요.
속죄로 자기 혀를 자르는 대신, 같은 입으로 그 이론을 옹호하는 책을 평생 쓰기로 결심하는 거예요.
세친의 두 번째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어요.
세친의 남은 생은 한때 자신이 부정했던 유식학파(唯識學派)를 세우는 데 바쳐졌어요.
유식학파는 "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일 뿐이다"라는 사상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 전체가 마음이 만들어낸 일종의 시뮬레이션이고, 마음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주장이에요.
세친은 『유식이십론』과 『유식삼십송』을 써서 형 무착과 함께 이 학파의 이론적 토대를 완성했어요.
그리고 그가 젊은 시절 집대성한 『구사론』은 자신이 떠난 부파불교 진영에서도 여전히 표준 교과서로 남아 있었어요.
한 학자가 두 번의 인생을 살면서 서로 다른 두 진영 모두에 정전(正典)을 남긴 거예요.
정전이란 한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기준 텍스트를 말해요.
인도 사상사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히는 일이에요.
세친이 칼을 내려놓고 붓을 든 그 결심 하나가, 결국 인도 불교 전체의 지형을 바꿔놓은 셈이에요.
지금도 동아시아 불교 수행자들이 펼치는 책 가운데 하나는 그가 젊어서 쓴 책이고, 또 하나는 그가 나이 들어 쓴 책인 경우가 많아요.
혀를 자르려 했던 그 사람이, 결국 가장 많은 말을 남긴 셈이에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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